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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한인 이야기/ 뉴욕 최초의 한인 치과의사 윤종선

문화충격 이겨내고 성공적 이민생활 1.5세대의 맏형
퀸즈 플러싱에 가장 먼저 정착한 일가로 유명

입력일자: 2011-06-30 (목)  
1951년 3월. 대서양의 찬 바닷바람을 가르며 여객선이 스태튼 아일랜드를 왼편으로 두고 맨하탄으로 들어올 때 16살 감수성 민감한 소년의 눈에 비친 뉴욕항의 첫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새벽안개 속에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 여신상의 모습은 그때까지 느껴보지 못한 묘한 감흥을 이 어린 소년에게 새겨주었다. 정확하게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한동안 몸이 얼어붙은 채 여신상의 신비스러운 모습을 감격 속에 응시했다.

이렇게 시작된 소년 윤종선의 뉴욕생활은 2002년 3월17일 만 51년만에 마감됐다. 웨체스터 연합교회에서 치러진 윤종선 장로의 이날 장례식은 평생 고인과 인연을 맺어온 친지, 교우들의 오열 속에 엄수됐다. 집도 목사는 이날 장례예배를 위해 특별히 순서를 마련할 필요가 없었다. 고인이 떠나기 전 손수 자신의 장례 예배 순서를 준비해 놓고 갔기 때문이었다. 성경 귀절, 기도 순서, 찬송가 순서도 미리 정해 놓았고 조문객들을 접대할 식당도 미리 지정해 놓았기 때문에 목사나 유가족들이 고인의 유언에 따라 움직이기만 하면 됐다. 그만큼 평소 매사에 철저했던 고인이었다.

뉴욕 한인 커뮤니티 차원에서 본다면 그는 초기 이민사회의 1,5세로 분류된다. 부모의 손에 이끌려 문화가 다른 미국사회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이질적인 문화를 소화하느라 고통을 겪었다. 1세인 부모와 고생을 함께 나누면서 현지에서 태어난 2세와는 정신적인 고통을 함께 나눈 세대였다. 뉴욕에서 1,5세대의 맞형으로 꼽을 수 있는 그는 자기 세대의 문화충격을 당당히 극복하고 한인 최초의 치과의사라는 기록으로 성공적인 이민을 살다 간 인물이었다.

메인 주립대와 뉴욕대 치과대학을 졸업하고 63년 노르웨이 출신 학교 선배 닥터 로켄과 함께 치과 오피스를 맨하탄 37가 파크 애비뉴에서 오픈할 때 그는 뉴욕에서 최초로 개업한 한인 의사였다. 어떤 면밀한 계획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선배 따라 멋모르고 뛰어든 셈이었지만 환자들이 늘고 장소가 좁아지자 65년 11월 독립을 하게 되었다. 400 매디슨 애비뉴(47가)에 한인 홀로 독립한다는 것도 당시로서는 무모하게 비쳐졌을지 모르나 한인들이 찾아왔고, 학교 다닐 때, 인턴 때 알던 레지던트, 의사, 간호사들의 소개로 환자들이 찾아와 65년 개업 당시 그의 클라이언트는 200명이 넘었다.

오래된 단골 환자 중엔 영화 ‘죠스’와 ‘올 댓 재즈’에 출연해 유명세를 타던 로이 쉐이더도 있었다. 개업초기 부모들을 따라왔던 자녀들이 장성해 그들의 손을 잡고 또다른 자녀들이 환자가 되어 찾아왔다. 달라지는 환자들의 얼굴을 보면서 그 역시 세월이 흐르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치과 의사를 천직으로 알고 그길로 매진했기 때문에 그의 오피스엔 항상 클라이언트들이 부킹돼 있었다. 필자도 60년대와 70년대 뉴욕한인사회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가끔 그의 오
피스에 들렸다. 그는 2000년 말까지 35년간 오피스를 지켰다. 그것도 건강이 나빠졌기 때문에 문을 닫은 것이었다.

한편 1960년 뉴욕한인회가 창립될 때 그의 부친 윤치창이 부회장으로 선출됐기 때문에 윤종선은 동생 해선을 데리고 3.1절이나 광복절 등 한인회 행사에 열심히 참석했다. 그가 한국에서 한때 다녔던 경기고 동창회에도 나갔다. 졸업을 하진 못했지만 중학교때 동기동창이던 차문영을 비롯해 정낙영, 정신과 의사 김병석, 조각가 한용진 등과도 어울렸고 뉴욕한국학교 이사, 65년엔 뉴욕한인골프회의 회장, 81년에 창립된 뉴욕한인치과의사협회 회장도 역임하면서 한인사회에 참여했다. 그러나 당시의 한인회와 학생회는 주도권 싸움을 자주하는 것으로 그에게 비쳐졌기 때문에 되도록 깊이 인벌브 하기를 꺼렸다. 가끔씩 참석하다 보면 언성이 높아지는 경우가 많아 모처럼 봉사하려던 의지를 꺾곤 했다. 윤종선 뿐 아니라 많은 능력있는 인사들이 봉사를 하기 위해 한
인단체를 찾았다 봉변을 당하는 사례도 있었고 그런 연유로 한인사회를 등지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윤종선의 가족은 한인 밀집지역인 킌즈 플러싱에 제일 먼저 정착한 일가로도 유명하다. 부친 윤치창이 한국에 민주당 정권이 들어서면서 갑자기 터키 대사로 임명되어 부부가 임지로 떠나가자 윤종선은 청년 가장이 되어 동생들을 보살피던 시절이 있었다. 치과대학을 열심히 다니던 61년초 부친이 귀국중 뇌출혈로 쓰러져 입원하는 바람에 대사직도 사임하고 뉴욕으로 돌아왔을 때 가족은 그때까지 살던 아스토리아에서 플러싱 41애비뉴와 유니온 스트릿 코너에 있는 아파트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이때가 1963년으로 플러싱 메도우스 코로나 파크에서 열린 뉴욕박람회(1964-65)보다 한해 전의 일이었다. 박람회가 끝나면서 많은 한인들이 플러싱에 정착했던 역사로 본다면 윤종선 일가가 그곳에 미리 터를 닦아놓은 셈이었다. 윤종선의 동생 해선은 아직도 플러싱에 살고 있으므로 가장 오래된 한인의 기록과 함께 최초의 스타이브센트 고교 졸업생의 기록도 갖고 있다. 지금 이 시대에 가문을 들추는 것은 큰 의미가 없겠지만 윤종선의 친가와 외가는 한국에서도
드문 명문이었다. 친할아버지가 구한말 군부대신을 지낸 윤웅렬이었고 큰아버지 윤치호는 최초의 영어 통역으로 초대 주한공사 루시어스 푸트 장군을 보좌한 끝에 미국 에머리 대학을 졸업한 개화기 선각자였다.

둘째 큰아버지 윤치왕은 영국에서 의학공부를 하고 돌아와 해방후 군의감을 지냈다. 초대 영국공사를 지낸 아버지 윤치창은 1920년대 시카고 대학을 다닌 유학파였고 어머니 손진실도 비슷한 시기 아이오와 듀북대학에 유학한 인텔리 여성이었다. 외할아버지 손정도 목사는 상해 임시정부 의정원장을 지낸 독립투사였고 외삼촌 손원일은 해군제독으로 국방장관을 지낸 인물이었다. 그런 만큼 청년 시절의 윤종선은 내심 긍지를 가졌던 한편으로 이민생활의 어려움을 부모와 함께 겪은 적도 있었다. 고교시절 맨하탄 인쇄소에서 파트타임 아르바이트를 했고 대학시절에는 7년간이나 식당 버스보이와 웨이터로 학비를 벌었다.

그는 1970년 서양화를 전공한 홍명혜(전 뉴욕총영사, 덴마크 대사 홍성욱의 장녀)와 결혼했고 슬하에 줄리아나(인경)와 조나단(인국) 남매를 두었다. 줄리아나는 현재 스페셜리스트 덴티스트로 아버지가 운영하던 오피스와 열 블럭 떨어진 매디슨 애비뉴 57가에서 치과의사로 일하고 있으며 웨스트포인트를 졸업한 아들 조나단은 현재 미육군 소령 군의관으로 그 역시 치과의사이다. 결국 윤종선의 대를 이들이 잇고 있는 셈이다.

조종무<국사편찬위원회 해외위원>


  ▲ 뒷줄 왼쪽부터 윤종선, 해선, 앞줄 왼쪽부터 여동생 원희, 모친 손진실, 막내 양희(사진 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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