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수립후 가장 큰 규모로 참가한 국제박람회
1664-65년 플러싱 메도우 팍서...17개업체 364명 참가
김하식. 송기화 부부 박람회 끝난후 맨하탄에 삼복식당 개업
1964년부터 65년까지 2년에 걸쳐 플러싱 메도우즈 코로나 파크에서 열린 뉴욕 만국박람회의 공식 명칭은 ‘The 1964/1965 New York World’s Fair’였다. 이 박람회에는 유럽, 아프리카, 중동, 남미, 아시아등 36개국이 참가했다. 캐나다, 오스트렐리아, 소련등이 불참했지만 5천1백만명이 관람한 성공적인 박람회였다. 20세기 중반 미국의 문화와 기술을 뽑낸 쇼케이스 행사로 박람회
의 주제는 ‘이해를 통한 평화’였다.
유에스 스틸이 엄청난 양의 스테인레스 스틸을 쏟아부어 만든 12층 높이의 유니스피어, 지구본이 이행사의 심볼이 됐다. 코카콜라, 코닥, 듀퐁, IBM, 웨스팅하우스, Bell등 세계적인 기업들이 참가, 200개가 넘는 관이 설치됐다. 사방 1스퀘어 마일(2,6평방 킬로미터), 한국식으로 잰다면 79만평 대지에 연건평 10만여평에 미당국의 투자액만도 10억달러가 넘었다.
이 박람회는 두가지 관점에서 한인들의 주목을 끌었다. 첫째는 당시 군사정부가 심혈을 기울여 참가한 한국정부 최초의 미국에서 열린 세계박람회였다는 점. 사실상 한국인이 참가한 미국 박람회는 1883년 보스턴 국제박람회와 1893년 시카고 세계박람회가 있었지만 둘다 구한말에 소규모의 참가에 그쳤던 것이었고, 한국정부 수립후 가장많은 예산을 들여 대규모로 참가한 국제행
사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 둘째는 뉴욕지역 한인이민으로는 비교적 초기에 속하는 60년대 중반 박람회 참가자중 2백여명이 넘는 집단 이민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도 의미를 지닌다. 또한 이들에 의해 플러싱 일대가 한인 밀집지역으로 조성된 공로도 있다.
1964년 4월22일 개막된 이박람회는 연중 계속 열린것이 아니고 6개월씩 두 시즌에 걸쳐 문을 열었다. 64년에는 4월부터 10월18일까지 6개월간, 65년에도 같은 시기에 열려 10월17일 폐막됐다. 총 365일간 열린 이 박람회에 한국관도 설치되어 320만명의 관람기록을 세웠다. 한국관에 참가한 인원은 총 364명, 이들중 3분의 2가 넘는 2백여명이 박람회가 끝나면서 현지에 눌러앉았다. 당시 참가업체들은 모두 17개. 금강산, 한국회관등 2개 식당업체와 국제상사, 중앙공예, 텍스타일 업체등이인삼, 놋그릇, 옥돌, 조화, 실크 품목등 한국상품을 소개했고 오명자 무용단, 태권도 시범단도 참가했다.
박람회에 투입된 350여명의 한국 방문단은 단기 취업비자로 입국해 개최장소에서 가까운 퀸즈의 엘름허스트, 플러싱, 큐가든등에 아파트나 집을 얻어 거주했다. 박람회가 열리는 봄부터 초가을 까지는 괜찮았으나 폐쇄되는 겨울에는 각기 다른 일자리를 찾아 나섰다. 그런데 그들의 입국비자는 미국 현지에서 일을 하면 안되는 조건이었다.
당시 뉴욕총영사를 지낸 장재용은 비자조항을 위반한 한인들이 집단으로 이민국에 체포돼 그들을 석방시키는데 애를 먹었던 사레를 회고했다. 그때 박람회가 6개월 열고 겨울에는 닫았거든요. 그동안 투입된 인력들은 원칙으로 말하자면 일단 본국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일본인들은 사실상 그렇게 했어요. 자기네들 배가 자주 왔다 갔다 하니까 그랬는데 한인들은 어려웠죠. 미국에 머물더라도 일을 하지 않아야 되는데 일부는 일을 하거나 장사를 한다고 그래요. 그때 제가 정 일을 하려면 미국변호사를 통해 말썽 안나도록 조심하라고 분명히 일렀는데 금요일 저녁엔가 이민국에서 모두 잡아갔다는 거에요. 주말을 넘기고 월요일 새벽 5시에 제가 이민국을 찾아가 각서를 쓴후에야 남녀 30여명을 데리고 나왔어요. 그후로 이들은 재주껏 미국에 합법적으로 남아 거의가 식당을 열거나 점포 주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일행중 서울 소공동에서 한국회관을 경영했던 김하식, 송기화 부부는 박람회가 끝나자 직원 30여명을 데리고 맨하탄 127 W. 43스트릿에 삼복식당을 개업했다. 56가에 있던 아리랑에 이어 두번째 한국식당이었다. 그리고 70년에는 본격적인 최초의 한국 그로서리 삼복식품도 개점했다. 당시 고모부 김하식씨의 매니저로 입국했던 송종국은 뉴욕한국일보 이민수기자와의 인터뷰
(2003년 1월2일자)에서 박람회 참가자들은 모두 고생이 많았다고 말했다. 겨울철 취직도 힘들도 노동비자 얻기도 어려웠다고 회상했다. 그는 박람회가 끝난후 2년간 삼복식당에서 일하다가 67년에 독립해 퀸즈 루즈벨트 애비뉴 80가에 동양 그로서리를 오픈해 운영했다고 밝혔다. 나머지 인원들은 뿔뿔이 흩어져 나름대로 갈길을 찾았다. 대부분이 취업을 통한 합법신분으로 플러
싱 일대에 눌러 앉았다. 영주권을 취득한 이들은 또한 한국에 있는 직계가족, 형제자매들을 초청하는 방식으로 친족사회를 넓혀나갔다.
이무렵 테네시주 조지 파바디 칼리지를 거쳐 뉴욕의 뱅크 스트릿 칼리지로 유학와 있던 허병렬(뉴욕한국학교 창설자)은 오래전 부터 뉴욕에 거주하던 동생 부부를 졸라 그때만 하더라도 먼곳으로 여겨지던 플러싱 박람회장을 돌아보고 기막힌 시설에 놀랐던 기억을 떠올렸다. 지하철 7트레인도 그때 개통됐다는 말을 들었다. 그는 당시 사용하던 시설 일부가 그대로 남겨져 지금도 보기에 좋다고 말했다. 대부분의 시설물은 박람회가 끝난후 6개월 이내에 철수됐지만 박람회 심벌로 여겨졌던 지구본과 소극장등 몇개 시설은 지금도 남아 공원의 일부로서 기능을 다하고 있다.
공중에서 본 1964/1965 뉴욕박람회 전경
■ 뉴욕박람회 한국관
112만달러 정부 예산 지원
63년 7월 기공...9개월만에 완공
박람회장 내 한국관
뉴욕박람회의 한국관은 공식 준비기관인 대한무역진흥공사가 62년6월 박람회 당국과 공식 계약을 체결하고 정부지원으로 63년7월 기공에 들어갔다. 김중업씨의 설계로 본관과 별관으로 구분, 실제크기의 다보탑 모형이 한국관 앞에 세워졌다. 설치 예산은 112만 달러였고, 64년 4월22일 개관일에 맞춰 내부시설 까지 마무리했다. 한국관 총면적은 2만3천7백 스퀘어 피트(658평). 본관(5,040 스퀘어 피트)에는 산업 전시장과 문화 전시장, 직매장이 설치됐고 투입된 직원은 132명. 별관(8,720 스퀘어 피트)은 식당으로 한국회관과 금강산이 들어섰다. 인원은 232명. 여기서 갈비, 불고기, 잡채, 냉면, 찌개등 한국의 대표적인 음식들이 소개되어 미국언론과 외국인들로 부터 좋은 반응을 얻었다.
■한국관 기공식에 참석한 인사들, 왼쪽부터 이수영 주유엔대사, 인기 여배우 최은희. 로버트 모제스 박람회 책임자, 김정열 주미대사.
조중무<언론인,한국 국사편찬위원회 해외사료 조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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