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든 제 손으로 만져보고, 조물거려 만들어 보는 걸 좋아하는 큰아이는 언제나 새로운 도전에 굶주려 있다. 책 속 레시피 하나를 펼치기만 해도, 마치 마음속에 작은 불꽃이 켜진 듯, 꼭 제 손으로 해내야만 직성이 풀리는 모양이다. “재료는 무엇을 써야 해요?” “도구는 어떤 걸 써야 하나요?” 라고 묻는 말투는 질문이라기보다, 만들겠다는 의지의 표현에 가깝다. 빠진 재료를 채우기 위해 아이와 나란히 장을 보러 나서는 길은, 어느새 우리 집의 익숙한 풍경이 되었다.
요즘 아이가 손에서 놓지 않는 책은 디저트의 역사와 조리법을 다룬 만화책이다. 거기에 나온 쿠키를 여러 번 구워 본 것은 단맛의 탐닉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무언가를 이루어냈다는 기쁨을 맛보고 싶은 즐거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이는 제 정성이 깃든 쿠키를 학교에 가져가 친구들과 나누기도 하고, 심장병 어린이를 돕는 기금 모금을 위해 팔기도 했다.
이번에는 같은 시리즈의 다른 책을 보더니, 치즈를 만들어보고 싶다고 했다. ‘치즈라니?’ 뜻밖의 제안에 웃음이 먼저 터졌지만, 우유와 식초, 소금만 있으면 된다는 설명을 듣고 보니 어렵지 않겠다 싶었다. 다만 ‘치즈 천’이라는 생소한 도구가 필요하다기에, 아마존에 주문을 넣어 주었다. 나조차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이었으니, 우리 집 치즈 만들기는 갓 열 살이 된 아이가 먼저 앞장을 선 셈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는 가방을 내려놓기가 무섭게 치즈 천의 행방을 물었다. 얇고 성긴 천을 내어주자 금세 얼굴이 환해지며, “지금 당장 만들어요!”라고 조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책을 훑어 보던 아이의 표정은 이내 어두워졌다. 고온 살균된 우유는 단백질 변성 때문에 치즈가 되지 않는다는 문구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우리 집 냉장고를 채운 우유는 모두 유통기한이 넉넉한 고온 살균 우유 뿐이었다.
그날 저녁, 우리는 기어이 집 근처 수퍼마켓으로 향했다. 새로운 시도를 할 때는 재료 하나하나를 꼼꼼히 살펴야 한다는 걸 자연스레 가르쳐 줄 좋은 기회라 여겼다. 코끝이 시린 겨울 밤이었지만, 오늘 꼭 치즈를 만들어 보겠다는 아이의 고집은 꺾이지 않았다. 선반을 뒤지던 아이는 가장 값싼 우유만이 고온 살균을 거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신기한 듯 웃음을 터뜨렸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우리는 적막한 밤의 주방에 마주 섰다. ‘내일 해도 되겠지’라는 내 안의 게으름보다, 이 순간을 고대했을 아이의 마음이 더 소중하게 다가왔다. 남편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딸아이를 재우러 올라갔고, 부엌에는 우리 둘만의 작은 실험실이 차려졌다.
치즈 만들기는 생각보다 수월했다. 데운 우유에 식초를 떨어뜨리자, 흰 액체가 금세 몽글몽글 엉겨 붙었다. 잠시 숨을 고른 뒤, 치즈 천에 부어 조심스레 짜내자, 고소하고 보드라운 치즈 한 덩이가 아이의 작은 손바닥 위에 오롯이 내려앉았다. 처음 맛본 그 치즈는 값비싼 레스토랑의 어떤 요리보다 깊은 풍미를 지니고 있었다. 함께한 시간과 손길, 그리고 아이의 진지한 호기심이 눅진하게 녹아 든 덕분일 것이다.
오늘 우리가 빚어낸 것은 단순한 치즈 한 덩이가 아니었다. 재료를 고르고, 머리를 맞대어 고민하며, 늦은 밤 조용한 부엌에서 보내는 그 시간 자체가 오래도록 남을 따스한 기억이었다. 훗날 아이가 자라 어느 겨울 밤의 부엌을 떠올릴 때, 이 기억은 은은한 등불처럼 마음속에 남을 것이다. 혹은 어느 길모퉁이에서 우유 한 병을 마주하고, 엄마와 함께 치즈를 만들던 그 밤의 온기를 떠올리며, 슬며시 미소 지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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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민진 워싱턴문인회,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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