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염재(不染齋) 김희겸(金喜謙, ?-1763) (산에 있는 집에서 책을 읽다) 간송미술관
늦은 봄 산기슭에 봄꽃이 만발하고
물가의 버드나무 봄바람에 흔들리네
자그마한 모옥(茅屋)이 유난히 밝은데
마루 위의 노 선비 의관을 정제하고
낭랑하게 글 읽는 소리 바람결에 퍼져가네
주역(周易)을 읽으시나 좌전(左傳)을 읽으시나
나무에 앉은 새도 지저귐을 멈추고
저 멀리 산짐승도 귀를 기울인다네
김희겸은 김희성(金喜誠)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조선 영조 시대의 도화서 화원이며 문인이었고, 황해도 풍천부(豊川府) 초도(椒島)의 무관직인 첨사(僉使), 사천 현감을 지냈다. 그는 겸재 정선의 문하에서 그림을 배웠고, 문인이며 화가이자 회화 평론가인 표암 강세황과도 교유하였으며 인물화, 산수화, 산수 인물도, 화조도, 초충도(草蟲圖)를 잘 그렸다.
이 그림의 배경은 속세와 멀리 떨어진 깊은 산 속의 작은 초당이다. 어느 봄날, 문을 활짝 열고 한 선비가 홀로 좌정하여 소리내 책을 읽고 있다. 산속 생활의 즐거움은 예로부터 많은 문인들이 시와 그림의 소재였는데, 중국 남송 시대의 나대경(羅大經)은 그의 저서 《학림옥로(鶴林玉露)》에서 <산거(山居)>라는 시를 통하여 산속에 사는 즐거움을 노래했다. 그의 시에는 ‘법첩(法帖), 필적(筆跡), 화권(畫券)을 펴놓고 마음껏 보다가, 흥이 나면 짤막한 시도 읊고 옥로시(玉露詩, 아름답고 고상하며 맑은 운치가 있는 시) 한두 단락 초(艸)도 잡아보네’라는 구절이 있어 김희겸의 이 그림 분위기와 잘 어울린다. 김희겸은 이 그림 외에도 산정일장(山靜日長), 산처치자(山妻稚子) 등 선비의 산속 생활에 대한 그림을 그렸다. 그의 호 불염재(不染齋)는 ‘물들지 않는 집’이라는 뜻이니 속세에 물들지 않고 고적(孤寂)하지만 즐거운 삶을 살고자 했던 그의 지향을 나타낸다.
이 그림 속의 방안 한쪽에는 책이 가득히 꽂혀 있고 선비의 뒤쪽에는 붉은색 탁자 위에 찻잔 하나가 놓여 있다. 당시 선비들은 지금처럼 책을 읽을 때 속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소리 내 읽었다. 조선시대 성리학의 거두인 우암 송시열은 새벽에 일어나면 맹자, 대학, 중용, 서경 등 책을 소리 내 읽으며 외웠다고 한다. 현대에도 책을 소리 내 읽는 것은 배움의 효과가 크다. 입으로 내는 소리가 눈으로 읽는 것과 함께 뇌를 강하게 자극하기 때문이다.
고요한 산속 이따금 새들이 지저귀며 날아가고 멀리서 맑은 계곡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려오고, 온화한 바람이 부는 한가한 봄날 오전, 선비가 낭랑하게 책을 읽는 소리가 온 산으로 퍼져 올라간다. 선비의 책 읽는 소리는 새소리, 바람소리, 물소리와 하나가 된다. 그림 속 초가집 주위의 나무들도 마치 선비의 글 읽는 소리가 바람결을 타고 퍼져가는 듯 왼쪽으로 구부러졌다.
멀리 보이는 산을 진경산수화풍으로 미점준(米點皴)을 써서 그렸고, 단조로울 수 있는 흑백의 수묵(水墨)에 의관을 바로 하고 정좌한 선비의 책이 놓인 서안(書案)과 책꽂이, 탁자를 붉게 채색하여 전체적으로 그림에 생동감을 준다. 화제(畵題) <讀周易國風左氏傳(독주역국풍좌씨전)>은 ‘주역, 시경, 춘추 해설서를 읽다’라는 뜻이다.
이 그림의 배경은 봄이지만 천고마비의 계절인 지금, 김희겸의 <산가독서>는 유튜브를 잠시 멀리하고 손에 책을 들어 읽고 싶은 마음을 일으키게 한다.
joseonkyc@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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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규용(메릴랜드대 화학생명공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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