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 매체에서 ‘작은 슈퍼’라는 표현을 보면 피식 웃음이 난다. 잘난 추남, 못난 미녀 같은 말장난처럼 들려서다. 꽤 오래 수퍼마켓이 일터였던 터라 ‘수퍼’라는 단어에 민감한 탓이기도 하겠다.
한국에서 ‘동네슈퍼’가 어떤 모습인지 나도 잘 안다. 40년 전 그러니까 휴학하고 군대 가기 직전에 막내 외삼촌이 하던 슈퍼 일을 거든 경험이 있으니까. 연쇄화사업 같은 생경한 단어와 더불어 동네마다 슈퍼마켓 바람이 불던 시절이다.
미국에 오니까 수퍼가 수퍼였다. 컸다. 엄청. 일상에서는 수퍼마켓이라는 말보다는 상호명으로 불렸는데 여기 워싱턴 DC 일대에서는 자이언트다. 장보러 간다 대신 자이언트 간다고들 했다. 자이언트만 해도 큰데 거기에 더해 수퍼라니, 이름부터 대단하지 않은가. 그래서 미국 어디 가나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라. 동네 골목대장일 뿐.
미국 그로서리 마켓에는 여전히 그 지역의 토호들이 버티고 있다. 뉴저지에서 매사추세츠에 이르는 뉴잉글랜드에는 스탑앤샵, 남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푸드 라이온, 크로거, 퍼블릭스 등이 칠성파, 서방파, 성남국제파 식으로 지역 상권을 잡고 있다.
코스트코, 월마트, 타켓 같은 전국구와 온라인의 불가사리 아마존으로부터 심각하게 위협을 받고 있지만 로컬 그 한마디가 부추기는 향토애가 뚝심으로 버텨주는 느낌이다. 사실 속내를 들여다보면 지역마다 브랜드가 다를 뿐 자본은 이미 통합이 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특히 유럽계 자본의 진출이 두드러진다.
수퍼마켓으로 유일하다시피 전국적으로 퍼져 있는 체인이 있다면 연조가 깊은 세이프웨이(Safeway)를 들겠다. 우리 동네도 자이언트와 세이프웨이가 대략 양분하고 여타 군소 체인들이 진입과 퇴각을 반복한다.
세월이 흘러 주변 동네가 쇠락하면 오래 된 매장을 매각하고 교외 신흥 주택가로 크게 지어 나가는 패턴이 계속되어 왔는데 그렇게 빈 자리를 이민자들이 치고 들어와 소수민족(ethnic), 인터내셔널 마켓이 시작됐다. 매장 면적으로 봐서 2만 평방피트, 6백평 내외. H-마트 역시 한아름 시절에는 그만 못 미치는 작은 매장이었다. 지금은 4만은 넘어야 수퍼의 격에 맞는다.
하여튼 세이프웨이 나간 자리에 들어가서 시작한 수퍼에 웨이로 끝나는 상호가 눈에 띈다. 베스트웨이, 푸드웨이. 한인자본이다. 세이프웨이 자리의 흔적인가, 한인 남성들의 18번 팝송 ‘마이웨이’의 영향인가.
세이프웨이, 안전한 길? 수퍼마켓 이름 웨이가 들어간 이유가 뭘까. ‘식품 안전’을 강조해서 ‘세이프’가 붙었나? 그게 아니다. 대공황 시절 식품점을 열면서 당시의 관행이던 외상장부를 없애고 현찰박치기, 캐시 앤 캐리(cash & carry) 결제를 고수하면서 나온 이름이다. 외상이면 소도 잡아먹는 빚의 나락에 떨어지지 않고 안전하게 살림을 도모할 수 있는 방식, 세이프 웨이(safe way)라는 철학이다. 끄덕끄덕.
캐시 앤 캐리라는 표현은 한인상인들 귀에도 익숙하다. 편의점, 델리, 식당 하는 분들이 새벽장을 보는 시내의 도매상이 캐시앤캐리를 상호에 썼으니까.
웨이 항렬의 수퍼가 또 있나 찾아봤더니 별로 없다. 뉴욕시에 오래된 페어웨이(Fairway)라고 있는데 정리단계인 것 같고, 중서부에 이란성쌍둥이로 유서 깊은 페어웨이(Fareway) 체인이 있다. 앞의 페어웨이는 시원한 골프장이라도 연상되는데 뒤의 페어웨이는 뭐냐. 요금길?
페어(fare)에는 차삯 말고 먹거리라는 뜻이 있어서다. 불어에서 온 메뉴(menu)라는 단어가 보편화 되기 이전인 1930년대까지만 해도 빌 오브 페어(bill of fare)라는 표현이 상차림으로 통했던 것이었다. 아하, 만고 쓸데없는 영어 공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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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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