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인생의 귀인’한 분쯤 있지 않나요? 저에게는 비구니 스님 한 분이 인생의 귀인이예요. 스님은 저의 습관적인 마음 작용을 바로 보게 해 주셨어요.
어린시절로 되돌아 가 보면 저는 마을에서 잉꼬 부부로 유명하셨던 조부모님 아래 무남독녀처럼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지만 젊은 엄마아빠와 살던 친구들을 늘 부러워했던 것 같아요. 그 부러움은 사춘기 즈음 내 마음을 슬픔으로 가득 차게 했고 내 머리를 번뇌로 가득 차게 해 학습부진으로 이어지기도 했어요. 할아버지의 교육열로 대도시로 나와 명문 사립 중학교에 다니고 있었지만 공부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가방만 나르는 학생이었거든요.
지금 생각해보면 학교에 매일 빠지지 않고 가방이라도 날라서 개근상을 탄 걸 보면 제 자신이 정말 대견해요. 그때도 분명 밝고 따사로운 나날들도 많았을 텐데 내마음은 암막 커튼을 친 것처럼 왜 그렇게 늘 깜깜했을까 싶어요.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저는 늘 내 상처가 제일 커 보였던 것 같아요.
상처의 깊이는 지극히 주관적인 것 같아요. 자신만의 세계에서 그 깊이를 오롯이 자신이 측정하는 거니까요. 그렇게 늘 나의 상처에 과대평가 점수를 주며 세상과 사람을 마주하다 보니 세상은 늘 저에게 불안전 한 곳이었고 사람은 늘 저에게 불편한 존재였던 것 같아요.
그런데 어느 날, 비구니스님 한 분이 저에게“상처는 사실이 아니다. 사실이 아니므로 깊은지 혹은 얕은지 측정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라고 말씀하셨을 땐 정말 뒤통수 한 대를 맞은 듯 멍~했어요. 상처는 늘 곁에 있음을 인정하며 살던 나인데 상처가 사실이 아니라 하니 정말 어이가 없고 딴 세상이야기 같았어요.
스님께서는 미국의 유명한 정신의학자 데이비드 홉킨스 박사의‘의식지도’ 이야기를 하시며 자신의 마음에 스스로 세운 상처필터를 거쳐 세상과 사람이 내게 다가온다고 하셨어요. 그 상처필터를 인정하면 의식의 수준은 늘 낮고 삶의 질도 그 의식 수준과 비례한다는 말씀도 하셨어요. 상처필터는 허상이니 더 이상 관여하지 말라고도 하시면서요.
신기하게도 그후 선명하게 보였던 저의 상처가 희미하게 보이며 편안해지기 시작했어요. 아마도 스님의 조언은 저의 마음 속,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곳에서부터 잘 받아들여진 것 같아요.
하지만 마흔이 훌쩍 넘은 지금도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나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는 가끔씩 상처필터가 자동재생 하려는 걸 느껴요. 아직 갈 길은 멀지만 그 필터의 작동을 인지하며 저 스스로에게 미소를 보이는 걸 보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어요.
인생의 귀인을 만난다는 것은 천금을 얻는 것보다 더 값진 것 같아요. 그들은 우리가 본래 지니고 있는 완전한 아름다움을 보도록 이끌어 주시니까요. 한국에 계신 저의 귀인, 비구니 스님께 감사의 말씀을 전하며 다음주 목요일에 뵈요.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