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 국무장관 향년 100세
▶ ‘핑퐁 외교·데탕트’ 주역, 냉전시대 외교질서 재편
미국 외교계의 거목 헨리 키신저(사진·로이터) 전 국무장관이 29일 100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키신저 전 장관의 국제외교정치 컨설팅사 ‘키신저 어소시어츠’는 이날 “존경받은 미국인 학자이자 정치인 헨리 키신저가 11월 29일 코네티컷 자택에서 별세했다”고 발표했다.
키신저 전 장관은 냉전의 세계 질서를 바꾼 전략가로 평가받는 외교계의 ‘살아있는 전설’로 통해왔다.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미국의 외교정책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1972년 당시 닉슨 미국 대통령과 마오쩌둥 중국 주석간 정상회담 성사를 이끄는 등 미·중 수교의 토대를 닦았다. 또한 구 소련과의 데탕트(긴장완화)를 조성하는 데도 큰 역할을 했다.
키신저는 국제 정치에서 국가 이익이나 세력 균형을 중시하는 현실주의 접근법을 취했다. 유대인 출신인 그는 1923년 독일에서 태어나 15세가 되던 해인 1938년 나치의 유대인 박해를 피해 뉴욕으로 건너갔다. 1954년 하버드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포드 행정부에서 발탁됐고 1969년 국가안보보좌관에 오른 데 이어 1973년 제56대 국무장관에 임명됐다.
키신저는 1971년 두차례 중국을 방문해 저우언라이 총리와 회담했고 이를 통해 이듬해 닉슨 대통령의 방중 및 미중 정상회담이 성사될 수 있었다. 미국과 중국이 20여년의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관계 개선에 나선 역사적 순간으로, 결국 미국과 중국은 1979년 공식적으로 수교했다.
키신저 전 장관은 베트남전 종식에 기여한 공로로 1973년 노벨평화상의 영예를 안았다. 그는 소련과의 데탕트 전략으로 1969년부터 전략무기제한협정 협상을 주도해 1972년 협정을 맺었다.
한반도 평화에도 관심을 가졌다. 1975년 유엔총회에서 한반도 긴장완화와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4자회담 개최를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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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세에 박사학위를 마치고, 50세에 국무장관이 되어 10년의 세월을 쥐락펴락했던 인물도, 또 다시 50년이 지나고 나자, 고인이 되었다. 그의 이름은 남지만, 그는 없고, 세월의 흐름에 따라 그의 업적도 이제는 실용가치가 없어졌다. 한 때를 살고 가는 것이 인생이다. 한창일 때, 이기적으로 살면 나이가 들어서도 추하게 된다. 그런 예들은 주변에 꽤 있는데, 그중에 최고봉은 인생을 더럽게 산 덕분이 인성도 저질이 되고, 생활의 내용도 걸레같이 된, 그래서 걸레같은 저질인간 트럼프가 아닌가 싶다. 이 자는 오래살지 않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