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4년 2월6일 저녁 프랑스 파리 콩코드 광장. 우익 연합 소속 시위대 수천 명이 운집해 국회의사당 쪽으로 움직였다. 의회 진출을 막는 경찰과 충돌한 시위대 일부가 총을 쏘고 경찰도 응사하며 시위는 유혈극으로 번졌다. 파리 시내 곳곳에서 새벽 2시까지 이어진 시위로 16명이 죽고 1,300여명이 다쳤다. ‘혁명의 나라’ 프랑스였지만 평시에 이 같은 유혈 사태가 일어나기는 초유의 상황. 좌파 연합정부를 이끌던 에두아르 달라디에 총리는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하려다 막히자 7일 사퇴했다. 대신 우익 성향이 강한 가스통 두메르그가 수상 자리에 올랐다.
1월 초부터 시작된 시위대의 요구는 의회 해산. 1932년 총선으로 집권한 좌파 연합을 부정한 시위대를 주도한 세력은 보불전쟁(1870년)으로 없어진 왕정으로 돌아가자는 왕당파와 극우 파시스트 세력. 의회제도 자체를 적으로 여긴 시위대의 핵심세력은 처음부터 무장한 상태였다. 결국 유혈극으로 번질 수밖에 없었던 시위에 수천 명의 시민이 합세한 것은 ‘의회의 도둑놈들을 없애자’는 극우 세력의 선동이 먹혔기 때문. 우크라이나 출신 유대인 스타비스키 스캔들을 비롯한 잇단 금융 추문을 집권 세력이 덮고 있다고 의심한 대중들이 시위대에 대거 끼었다.
경제 상황에 대한 불만도 정치적 혼란을 가중시켰다. 1929년 미국 월가의 주가 폭락으로 시작된 세계 대공황이 프랑스 경제를 뒤흔들고 정치도 혼란에 빠졌다. 좌파가 집권한 1932년 5월부터 1933년 9월까지 총리만 다섯 번이 바뀌는 상황 속에 경제는 점점 난국에 빠져들었다. 정당도 뒤섞였다. 다수당인 급진사회당은 프랑스 혁명의 계승자를 자처했지만 당내 우파와 좌파가 원수처럼 맞섰다. 사회당이 싫어 좌파 연합정부에 참여하기를 거부한 프랑스 공산당의 일부 예비역은 폭력시위 당시 파시스트 편에 서서 경찰과 싸울 정도였다.
좌우가 섞인 프랑스 정치지형에서 ‘2월6일의 위기’는 분명한 경고를 던졌다. 이탈리아의 무솔리니에 이어 독일의 히틀러가 집권하고 오스트리아도 파시즘으로 열병을 앓던 시기에 프랑스도 극우 파시즘이 집권할 수 있다는 사실이 증빙된 것이다. 위기는 좌파의 각성을 가져와 프랑스 제3공화국은 독일에 패전(1940년)할 때까지 이어졌다. 프랑스 극우는 나치의 괴뢰정부였던 비시 정권에 대거 참여해 전후 철퇴를 맞은 후 더욱더 고립적 민족주의에 빠져들며 약해졌으나 최근 외국인 혐오 등을 타고 살아나는 분위기다. 파시즘도 마찬가지다. 자유주의와 경제가 허약하거나 실패할 때 파시즘의 망령이 찾아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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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홍우 선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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