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선비 한분이 계셨는데, 너무 가난해서 식구들이 제대로 끼니를 꾸려갈 수 없을 정도였다. 4색 당파 간 당쟁이 극심하던 당시, 이 선비가 속한 당파와 대적관계에 있는 파가 권세를 잡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워낙 출중한 학문과 훌륭한 인격으로 이름난 분이라 집권세력으로부터 꾸준히 영입 설득을 받았다.
그럼에도 그는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꿋꿋이 지조를 지키면서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느 해 겨울 혹한이 닥치고 땔감이 떨어지자 부인이 나무등거리 하나를 주어와 도끼로 자르다 그만 자기 발등을 찍고 말았다. 피가 흐르는 발등을 잡은 채 주저앉은 부인을 보고 선비는 마음을 바꾸었다.
“더 이상 지조를 지킬 수가 없구나” 하면서 반대파에 전향의사를 전달했다. 다음날부터 선비 집에는 쌀과 장작과 기타 필요한 물건이 줄줄이 들어와서, 드디어 춥고 배고픈 고생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그런데 전향한 지 사흘 후, 권력의 안락함을 채 누려보기도 전에 정변이 일어나서, 이번에는 원래 소속의 당파가 득세를 하게 되었다. 이 억세게 운 나쁜 선비는 “아, 배고픔을 조금만 더 참았더라면…” 하고 한탄을 하면서 과거의 동지들에 의해서 잡혀갔다는 얘기이다.
몇 백년 묵은 옛날얘기를 꺼낸 것은, 최근 연속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총기난사 비극을 보면서 시간적 공간적으로 아무 상관이 없는 두 사건 사이에 어떤 공통적인 요소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바로 돈의 유혹에 안 넘어가기가 참 어렵다는 것이다.
21세기 미국 땅에서 계속 일어나고 있는 총기살상 책임의 큰 부분은 전국총기협회(NRA)와 이 협회를 옹호하는 정치인들에게 있다는 분석이다. NRA는 정치인들에게 막대한 선거자금을 기부함으로써 이들을 손아귀에 넣고 있고, 막대한 정치자금을 받은 정치인들은 총기협회에 맞서야하는 총기규제 입법을 꺼린다는 것이다.
시초에는 국가를 위해 훌륭한 정치인이 되리라는 사명감이 있었을 의원들이 총기협회가 휘두르는 막강한 돈의 위력 앞에서 도덕도, 소신도 접고 몸을 사리고 있는 것이 현재 미국 정치인들의 서글픈 모습이다. 돈에 무릎을 꿇었다는 점에서 이들 21세기 미국의 정치인과 수백년 전 조선의 선비가 비슷하지만, 변신의 동기를 보면, 두 케이스를 같은 잣대로 심판하는 것은 공평하지 않다.
지독한 가난 속에서도 신념을 지켜왔지만, 죄 없는 가족이 굶주림과 추위에 죽게 될 상황이 되자 어쩔 수 없이 전향한 선비에게 돌을 던질 자격은 아무에게도 없다. 반대로 이미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안락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더 큰 욕심 때문에 윤리, 도덕을 외면하고, 힘에 굴종하는 것은 마땅히 비판과 비난을 받을 만하다.
전자의 경우는 생명을 구하는 결정이고, 후자의 경우는 빌딩 한 개 가진 데서 여러 개로 늘리고 싶은 탐욕의 추구이기 때문이다.
현재에도 그렇고, 역사에서도 그렇고, 폭군이나 독재자들이 혼자서 폭정이나 독재정치를 하는 경우는 없다. 이들은 자신을 부추기고 조종해서, 더 많은 돈, 더 높은 지위, 더 큰 명예를 잡아보려는 야심가들에 의해 포위되어 있다.
이 “부추기는 사람들 (enablers)” 중 상당수가 명석한 두뇌, 일등교육, 사람을 조종하는 출중한 능력의 소유자들이다. 세계 어디든지 “힘이 정의이다”라는 철학을 신봉하는 이들 그룹이 권력을 독점하는 나라에서 보통 시민들은 사람대접을 받고 살기 어렵다. 국민들이 정신을 바짝 차려서 권리와 의무를 적극적으로 행사하는 것이 이런 불행한 사태를 막는 길일 것이다.
<
김순진 교육심리학 박사>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