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복 74주년 특별 인터뷰
▶ 구익균 선생 손자 제임스 최 한인사법경찰자문위 수석부회장

제임스 최 뉴욕한인사법경찰자문회의 부회장이 외할아버지 구익균 선생과 친어머니 등 흥사단원들이 함께 찍은 사진을 보여주며 독립운동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도산 안창호·김구 선생 등과 함께 독립운동 헌신
“박정희 정권이 주는 혜택 받을 수 없다” 연금 거절
“외할아버지의 회고록을 통해 왜곡된 항일 독립운동의 역사가 조금이라도 바로 잡혀졌으면 좋겠습니다.”
퀸즈 베이사이드에서 지난 13일 만난 제임스 최 뉴욕한인사법경찰자문위원회 수석부회장은 최고령 독립운동가로서 뉴욕과 한국을 오가며 활발한 활동을 벌이다 지난 2013년 타계한 외할아버지 항산 구익균 선생의 회고록 ‘새 역사의 여명에 서서’를 꺼내 보이며 “우리가 알고 있는 항일 운동사 가운데 예상 밖으로 많은 부분이 잘못 알려져 있다”며 이같이 말했다.
1908년 평안북도 용천군에서 태어난 구익균 선생은 1928년부터 신의주 고등 보통학교에서 학생회장을 맡으며 독립 운동을 시작했다. 1928년 항일잡지 ‘신우’의 편집인으로 활동했고 이듬해 3월 신의주 학생 의거를 일으킨 후 일본 경찰의 탄압을 피해 중국 상해로 망명했다.
구익균 선생은 젊은 시절부터 중국어와 일본어, 영어에 능통해 도산 안창호의 통역 겸 비서실장으로 근무하며 총애를 받았다. 또한 상해 인성학교 설립과 흥사단 입단 등을 통해 독립군 양성에 힘쓰는 한편 김구 선생이 이끄는 한국 독립당 조직위원으로도 활동했다.
1933년부터 중국 광둥의 중산대에 근무하면서 한국 유학생 지도책으로 활동하던 구익균 선생은 치안유지법 위반이라는 죄목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특히 사업가로도 비상한 능력을 발휘해 막대한 독립운동 자금을 댄 선생은 1945년 8월 상해 교민단장으로 있을 때 돈이 없어 조국에 돌아가지 못하고 1년간 애태우던 망명 동포 3,000명을 위해 당시로선 엄청난 액수인 60만달러를 희사한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해방 후에는 김구, 김규식 선생 등이 주동이 되어 창립한 통일 독립촉진회 상임위원으로 새 조국 건설 운동에 공헌했다.
1990년 초 미국에 온 뒤에는 코리아 영세 중립화 추진위원회의 상임 공동 대표를 맡아 스위스와 같은 한반도의 영세 중립국화를 추진했다. 이후 2005년 한국으로 귀국해 ‘도산 안창호 혁명사상연구원’을 창립했으며 2009년 대독립당을 재창당하고 활동하다 지난 2013년 독립운동가 중에서는 최고령인 105세 나이로 별세했다.
한국 정부는 1990년 구익균 선생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
독립과 통일 운동의 후견인 역할을 자처했지만 정작 가난 때문에 가정에는 소홀했다.
최 부회장은 “국가 유공자 자격을 수락하면 학비 면제나 연금 등의 혜택을 받을 수 있었지만 박정희 정권이 주는 혜택을 받은 순 없다며 거절해 어머니가 크게 상심했었다”며 “특히 박정희와 전두환 정권 등에서 입법 의원과 장관 자리를 준다고 회유했으나 고사하셨기에 외할아버지를 더욱 존경하게 됐다”고 밝혔다.
한편 최 부회장의 외증조할아버지이자 구익균 선생의 장인 장덕로 목사도 상해임시정부 수립에 참가했으며 흥사단 간부직을 맡으면서 독립운동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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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진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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