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립운동가 후손 존 배 작가 문화원 3·1 운동 100주년 기념전 개막행사 초대

지난 1일 존 배 작가가 아버지 배민수 열사의 사진을 소개하고 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가르침이 평생의 자산이죠.”
지난 1일 뉴욕한국문화원에서 열린 3·1 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 특별 전시 ‘함께하는 대한민국 100년’ 개막 행사에는 특별한 인물이 등장했다.
프랫인스티튜트의 조각과 최연소 학과장에 올라 30여년간 교수로 재직한 후 현재 커네티컷에서 작품활동을 계속하고 있는 존 배(81) 작가.
그는 2대에 걸친 독립운동가의 후손으로 이날 열린 개막 행사에 특별 초청됐다. 배 작가의 할아버지는 조국이 일제의 지배하에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의병활동에 투신, 한일합방을 1년 앞둔 1909년,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일제에 의해 참수된 배창근 열사다. 그는 자신의 12살 아들에게 ‘나라를 구하라’는 유언을 남겼고, 아들은 항일 무장기독교 단체인 조선국민회 활동과 3.1 만세 운동 참가 등으로 일제에 의해 두 차례 투옥 됐었다. 그가 바로 배 작가의 아버지인 배민수 열사다. 1931년 도미, 맥코믹 신학대와 프린스턴 신학대에서 공부하면서 그는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독립운동에 매진했다.
광복 후 귀국한 배민수 열사는 가족을 데리고 1948년 미국으로 다시 돌아왔다. 러시아에서 나고 자라 러시아어에 능통했던 아내 최순옥씨가 미소공동위원회 자리에 참석했다가, 볼셰비키가 러시아 민중을 해방시켰듯 러시아가 한국의 민중을 해방시킬 것이라는 소련 정부관계자의 말에 심상치 않은 상황을 감지하고 배민수 열사에게 미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한국전쟁이 터진 후 배민수 열사는 폐허가 된 고국을 재건하겠다며 구호활동을 위해 한국으로 돌아갔고 약 1년 뒤 최순옥씨도 남편을 따라 전쟁이 끝나지 않은 고국으로 귀국했다.
존 배 작가는 “아들과 남편 사이에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한국으로 떠나기로 결정을 내리고 헤어지며 어머니가 기차역에서 눈물을 흘리던 기억이 난다”며 “아버지와 내가 평생 대화를 나눈 시간은 단 하루도 안될 정도로 아버지는 바빴고, 한국으로 돌아간 어머니는 아버지를 도와 농촌 계몽운동을 함께 했다”고 말했다. 11살의 나이에 가족을 따라 도미했지만 조국이 우선인 부모를 둔 덕에 배 작가의 유년시절은 외로웠다. 어렸을때부터 미술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지만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아는 상황에서 예술을 하는 것은 사치이자 죄라는 생각에 감히 미대 진학은 꿈도 꾸지 못했다. 한국에서 부모를 따라 농촌 계몽운동을 하던 그에게 “여기서 당신이 할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미국에 가서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하라”는 누군가의 격려에 그는 마침내 자신의 길을 갈수 있었다.
배 작가는 독립운동가 후손 자격으로 매달 한국의 연금수령이 가능하지만 이를 사양했다. 그는 “할아버지 아버지에 대한 업적은 내가 직접 기여한 바가 없고 현재 미국 시민권자로 한국정부에 세금을 내지 않고 있기 때문에 연금을 받을수 없다”며 “정부가 대한민국 국민을 위해 좋은 곳에 사용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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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희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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