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운동 100주년 특별기획
▶ 1921년 3월 2일 서재필 주도로 ‘한인연합대회’ 열려
![98년전 맨하탄서 “대한독립만세”외쳤다 98년전 맨하탄서 “대한독립만세”외쳤다](http://image.koreatimes.com/article/2019/02/26/201902260713255c1.gif)
1921년 3월 2일 3.1운동 2주년을 기념하는 한인연합대회가 열렸던 맨하탄 ‘더 타운홀’ 전경.
한인 100명 등 총 1300여명 모여 한국독립 인정 촉구
미 정치인도 일제침략 비난…NYT등 주류언론 보도
지금으로부터 98년 전인 1921년 3월 2일 저녁.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가운데 맨하탄 한복판인 43스트릿과 6애비뉴 사이에 위치한 ‘더 타운홀’ 건물에 수많은 사람들의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무려 1,3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더 타운홀’의 모든 객석을 가득 메웠다. 이 중 100여 명은 한인이었고, 나머지는 타민족이었다. 하지만 이들이 모인 이유는 같았다. 바로 ‘한국의 독립’이었다.
100년 전인 1919년 3.1운동이 있은 지 2년 후인 1921년 미국의 심장인 뉴욕에서 3.1운동 2주년을 기념하고 한국의 독립을 염원하는 대규모 집회가 열렸다. 고 서재필 박사가 주도한 ‘한인연합대회’는 당시 뉴욕사회의 관심 속에 열렸지만 지금의 한인 중에서 이를 아는 이들은 많지 않다.
서재필 박사가 발간한 영문 월간지 ‘코리아리뷰’ 1921년 3월호에는 당시 한인연합대회의 상황이 상세히 소개돼 있다.
코리아 리뷰에는 “참석자가 1,300명 이상으로 뉴욕의 교육·종교·사업 등 각계각층을 대표하는 이들이었다”고 명시돼 있다. 당시 행사에 참석한 한인은 최대 100명 정도로 추산되는데, 연방 센서스에 따르면 1920년대 뉴욕에 사는 한인 인구는 30명이었다. 이는 뉴욕에 사는 모든 한인이 이날 3.1운동 기념식에 참석한 것임을 시사한다.
아울러 1,200명 이상은 한인이 아닌 미국인이었다는 점은 당시 한국의 독립에 관심과 지원을 아끼지 이들이 상당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행사 위원장을 맡은 서재필 박사의 개회사를 시작으로 ‘기미 독립선언서’가 영문으로 낭독됐다. 이후 정한경 임시정부 구미위원이 간결하지만 인상적인 연설을 했다. 그는 “일본은 자신들의 이익만을 위해 한국을 수탈하고 있지만, 한국인은 나라를 지키고 싶어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그는 한 한국인 여성이 미국 연방의원에게 보낸 편지에서 밝힌 한 문장을 인용해 한국인의 심정을 대변했다.“우리는 ‘미카도이즘(일제의 천황전체주의)’의 대상이 되느니 차라리 죽어 한국인의 자유로운 영혼이 되고 싶다.”
이날 윌리엄 메이슨 당시 일리노이주 연방하원의원 등 거물급 인사들의 참여도 눈에 띄었다. 일리노이 연방상원의원 등을 역임했던 메이슨 의원은 “미국이 한국의 독립을 즉각 인정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또 전 인디애나주지사와 연방하원의원, 필리핀 대사 등을 역임했던 뉴튼 길버트를 비롯해 당시 한국 독립을 지지했던 거물급 인사들이 연설을 이어갔다. 당시 뉴욕의 이름난 연주가인 파커 러셀은 한국인을 위로하는 마음을 담아 바이올린 연주를 해 큰 박수를 받았다. 이날 한인연합대회는 뉴욕주류사회에서도 큰 관심을 모았던 것으로 확인된다.
본보 취재 결과 뉴욕타임스는 행사 다음날인 1921년 3월 3일자 2면에 ‘메이슨 의원이 일본의 한국 침략 행위를 비난하다(MASON RAPS JAPAN FOR PIRACY IN KOREA)’는 제목의 기사로 한인연합대회를 조명했다. 뉴욕타임스는 기사에서 “메이슨 의원이 어젯밤 행사에서 일본의 한국 침략 행위를 비난했다.
그는 미국 정부에 한국의 독립을 인정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의 결의안을 상정했다”며 “행사는 서재필 박사가 주도했고 정한경 위원이 첫 연설자로 나섰다”고 전했다.뉴욕타임스 외에 당시 일간지였던 뉴욕트리뷴 역시 3월3일자 3면 기사에서 맨하탄에서 열린 3.1운동 2주년 기념식과 메이슨 의원 등의 참석 및 입장을 자세히 보도했다. 뉴욕시의 유력 일간지들이 잇따라 소개할 만큼 주목받은 행사였던 것이다.
맨하탄의 한인연합대회는 뉴욕에서의 항일 운동이 본격화되는 모태가 됐다. 연합대회에 참가한 한인들에 의해 같은해 컬럼비아대 맞은편에 뉴욕한인교회가 설립됐다. 이 교회에서 서재필·이승만·안익태·조병옥 등 수많은 애국지사가 활동하는 등 뉴욕 독립운동의 산실 역할을 했다.
98년 전 ‘대한 독립 만세’가 울려퍼졌던 맨하탄의 더 타운홀은 현재도 운영 중이다.
한인연합대회가 열리기 두 달 전인 1921년 1월 12일 개관한 타운홀은 초기에는대중 교육을 위한 집회 장소로 주로 쓰였고 지금은 뉴욕시민을 위한 각종 문화공연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현재에도 개관 당시의 원형이 잘 보존돼 있으며 2012년 국립역사유적지로 지정될 만큼 유서 깊은 곳이다. 더 타운홀(123 W 43rd St)은 한인들과 한국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타임스퀘어에서 불과 한 블록 거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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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한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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