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나경‘경치’
그들은 〈서정시〉라는 파일 속에 그를 가두었다
서정시마저 불온한 것으로 믿으려 했기에
파일에는 가령 이런 것들이 들어 있었을 것이다
머리카락 한 줌
손톱 몇 조각
한쪽 귀퉁이가 해진 손수건
체크무늬 재킷 한 벌
낡은 가죽 가방과 몇 권의 책
스푼과 포크
고치다 만 원고 뭉치
은테 안경과 초록색 안경집
침묵 한 병
숲에서 주워온 나뭇잎 몇 개
붕대에 남은 체취는 유리병에 밀봉되고
-중략-
이 사랑의 나날 중에 대체 무엇이 불온하단 말인가
그들이 두려워한 것은
그가 사람의 마음을 열 수 있는 말을 가졌다는 것
마음의 뿌리를 돌보며 살았다는 것
자물쇠 고치는 노역에도
시 쓰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는 것
파일명 〈서정시〉에서 풀려난
서정시들은 이제 햇빛을 받으며 고요히 반짝인다
그의 생애를 견뎌온 문장들 사이로
한 사람이 걸어 나온다, 맨발로, 그림자조차 걸치지 않고
나희덕 (1966년~ ) ‘파일명<서정시>’
‘파일명 <서정시>’는 문화계 블랙리스트처럼 공권력의 감시·검열문제를 독일 서정시인 라이너 쿤체 이야기에 빗대 쓴 것이다. 쿤체를 감시한 구 동독 정보국이 그에 관해 수집한 자료집 파일이름이 ‘서정시’(Lyrik)였다고 한다. 나 시인은 ”세월호를 비롯해 블랙리스트 문제 등으로 참담한 속에서 시가 할 수 있는 역할이 무언가 자주 물었던 것 같고, 뭔가 논리적인 답변이나 대안을 내놓을 순 없지만, 그런 고통받는 사람들과 함께하고 진혼 하는 식으로 시를 썼다“ 고 말한다. 충분한 설명 같다. 서정이란 한 개인의 심부에서 생의 불씨를 지키는 가장 인간적인 인간의 혼불이다. 파일명 블랙리스트 위로 인간이라는 맨발의 서정시가 햇빛을 받으며 걸어 나오고 있다. 지면상 중략한 아쉬움이 큰, 오랜만에 보는 참 좋은 시다. 임혜신<시인>
<
나희덕 (196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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