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인점에서 고르고 고른
새 냄비를 하나 사서 안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때마침 폭설 내려
이사 온 지 얼마 안 된 불안한 길마저 다 지워지고
한순간 허공에 걸린 아파트만을 보며 걸어가고 있었는데
품속의 냄비에게서
희한하게도 위안을 얻는 것이었다
깊고 우묵한 이 냄비 속에서 그동안
내가 끓여낼 밥이 저 폭설만큼 많아서일까
내가 삶아낼 나물이 저 산의 나무들만큼 첩첩이어서일까
천지간 일이 다 냄비와 무관하지 않은 듯하고
불과 열을 이겨낼 냄비의 세월에 비하면
그깟 길 하나 못 찾는 건 아무것도 아니라고
품속의 냄비에게서
희한하게도 밥 익는 김처럼
한 줄의 말씀이 길게 새어나오는 것이었다
문성해(1963- ) ‘냄비’ 전문
아무것도 아닌 냄비 하나가 눈보라치는 겨울 길을 가는 이에게 따스한 밥의 말씀을 건다. 뭐니 뭐니 해도 밥만 한 것이 있겠는가. 낮고 따스한 영혼을 지닌 자에게는 냄비 하나도 그냥 오는 법이 업다. 숟가락 하나면 어떻겠는가. 천금을 품고 행여 잃을세라, 경계와 불안의 길을 가는 이와는 차원이 다르다. 이 냄비는 그저 나물이나 삶아낼 냄비가 아니라 우리들 영혼의 뱃심인 것이다. 천지간 일이 다 뱃심에서 나오는 것. 우묵한 소시민의 냄비철학이여! 뱃심 하나로 또 한 해를 걷기 시작한 착하고 꿋꿋한 모든 이들에게 축복을! 임혜신<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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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성해(196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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