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동현,‘Companion’
남자가 김치를 찢는다 가운데에다 젓가락을 폭 찔러넣는다 여자가 콩자반을 하나 집어먹는다 고개를 숙이고 있다 남자가 젓가락을 최대한 벌린다 다 찢어지지 않는다 여자가 콩자반을 두 개 집어먹는다 왼팔을 식탁 위에 얹고 고개를 꼬고 있다
남자가 줄기 쪽에 다시 젓가락을 찔러넣는다 젓가락을 콤파스처럼 벌린다 김치 양념이 여자의 밥그릇에 튄다 여자가 쳐다보지 않는다 콩자반을 세 개 집어먹는다 남자가 김치를 들어올린다 떨어지지 않은 쪽이 딸려 올라온다 여자가 콩자반을 네 개 집어먹지 않는다 딸려 올라가는 김치를 잡는다 남자와 여자가 밥 먹는 것을 중단하고 말없이 김치를 찢는다
김치를 전부 찢어놓은 남자와 여자가 밥을 먹는다 말없이 계속 먹는다 여자는 찢어놓은 김치를 먹지 않는다 깻잎 장아찌를 집는다 두 장이 한꺼번에 집힌다 남자가 한 장을 뗀다 깻잎 자루에서 남자의 젓가락 끝과 여자의 젓가락 끝이 부딪친다 찢어주느라 찢어지지 못한 늦은 아침
늙은 냉장고가 으음 하고 돌아간다
허은실 (1975- ) ‘소수 3’
남자와 여자가 찬 없는 밥을 먹는다. 생에 지친 사람들 같다. 시인은 그들을 소수라 이름 한다. 하지만 그들은 소수가 아니라 다수다. 보이지 않는 소외계층이라는 데서만 소수일 뿐이다. 이들은 말을 하지 않는다. 쳐다보지도 않는다. 오고 가는 건 젓가락뿐이다. 그 젓가락질 안에 마음이 오간다. 김치를 찢어주고 깻잎을 떼어주며 함께 밥을 먹는 이들은 아주 가까운 관계다. 좋은 관계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몸을 부딪치듯, 입술이 부딪치듯 찬 젓가락이 부딪친다. 늙은 냉장고처럼 힘겹게 그들의 인연은 돌아간다. 낮아서 인간적인 정경, 다수인 소수들의 아침이다. 임혜신<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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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은실 (197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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