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안홍균의 ‘코리아 게이트’증언 25
▶ ■ KG 에피소드와 내가 겪은 미 의회
하원윤리위와 프레이저소위의 각 조사팀이 있는 복도를 의회 경관이 지키고 있다.
미 의회에서 코리아게이트사건과 관련해 구성된 전문위원 팀(Special Professional Staff)의 일원으로 일했던 경험을 나는 몹시 귀중히 생각한다. 미 의회의 본질과 기능을 배웠으며 이 나라의 사법수사 원칙과 행동양식도 상당수준 익혔다. 유일한 한국계인 나를 윤리위원회 위원장을 비롯해 상사 검찰관과 조사관들은 정중한 예의와 동료의식으로 대해주었다. 조사대상인 한국과 한국 인사를 논할 때 그들은 한 조각의 편견이나 악의 없이 행동했다. 몇 가지 기억에 남아있는 일화 단상을 적어본다.
-최덕신 “박 정권은 무너집니다”
하원윤리위원회와 프레이저소위원회의 각 조사팀은 레이번 의원회관 근처에 있는 과거 FBI의 지문보관소 2층에 복도를 사이에 두고 자리 잡고 있었다. 외부 출입을 통제하기 위해 의회 경관이 우중충한 복도에 놓인 책상에 상주하고 있었다.
복도 건너 프레이저 팀 사무실에는 옛 한국대사관 직원을 포함한 한국계 인사들의 왕래가 잦았다. 하루는 최덕신이 나오는 것을 보았다. 내가 상무대 간부후보생 시절 그는 보병학교 교장이었고 휴전회담 한국군 대표로 휴전협정 조인을 거부했으며 외무장관을 역임한 인사다.
나는 그를 우리 사무실로 안내하고 조사팀 검찰관들을 소개했다. 최덕신은 정중한 영접에 만족한 듯 말을 꺼냈다. “그대로 밀고 나가세요. 그러면 박정희 정권은 꼭 무너집니다.”
의외의 말에 모두들 어리둥절했다. 얼마 후 최덕신은 평양으로 갔다는 말을 들었다.
-기생 파티와 친한파
코리아게이트 조사가 진행되는 동안 한국과 친밀한 관계가 있는 의원, 방한 경력이 있는 의원들의 심기는 편하지 않았다. 조사관이 한 의원실에 나타나 신분증을 제시하자 놀란 리셉션 데스크의 여비서는 쥐고 있던 연필을 떨어뜨리기도 했다.
그 무렵, 내 사무실에는 명예박사 수여증이 쌓여 있었다. 미 의원들이 한국 방문 때 받은 학위 액자를 임의 제출한 것이다. 그 옆에는 양복이 쌓였다. 잘못을 변명하는 중학생처럼 의원들이 애처롭게 해명했다. 한국 호텔방에 예고도 없이 재단사가 찾아와 신체 사이즈를 재 갔다는 것이다. 그리고 양복을 갖고 왔는데 사실 몸에 그리 맞지도 않았다 한다. 쌓여가는 양복더미를 보며 내 심기는 썩 좋지 않았다.
한 의원은 기생 파티 광경을 소개했다. 그는 패스맨 의원이 춤을 추며 상대 기생에게 속삭이는 것을 들었다고 전했다. “PL480을 잊지 말라”고. Public Law 480은 외국 경제원조 공법을 말한다.
그 밖에 들은 이야기가 많다. 하지만 이러한 음성적 측면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이른바 초청외교는 많은 결실을 거두었다. 판문점을 방문한 미 의원들은 한국 안보의 긴박성을 몸으로 체험했고 산업현장에서는 불굴의 건설의욕을 확인했고 한국 특유의 환대에 깊은 우정을 느꼈다. 많은 미 의원이 한국 언론이 일컫는 친한파, 지한파로 변신했다.
오른쪽은 조사팀 사무실에서 집무 중인 안홍균 씨.
-이상한 타자수 제인
임시직 타자수 제인은 좀 이상한 존재였다. 능력도, 여성다운 점도, 근무상태도 수준이하다. 그가 어떻게 우리 사무실에서 일하게 됐는지 아무도 몰랐다. 한번은 내 보고서를 타이프 했는데 $1,000를 $1로 타자해 왔기에 지적했더니 $는 1,000을 의미한다고 강변했다.
복도에서 경비근무 중이던 여성 경관이 미국 남부의 짙은 사투리로 나를 불렀다. “미...쓰터 애...ㄴ!!!” 그리고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국회의원이 한국에 가면 게이샤 걸을 제공한다는데 제인을 미...쓰터 애...ㄴ에게 드리면 어떻겠냐고. 나는 반응을 못 했다. 웃고 넘길 수가 없었다.
-오닐 하원의장과 박동선
지역구와 워싱턴을 오가며 이중 살림을 하는 의원 가운데 많은 인사가 생활비 절약을 위해 동료 의원들과 한 아파트를 임대해 동거한다. 오닐 하원의장도 원내대표 시절 그런 식으로 생활했다. 헌데 조사팀에게 한 장의 투서가 날아들었다. 박동선이 오닐의 아파트 임대료를 대납했다는 것이다. 사실이면 뇌물사건이다. 조사관들은 긴장했으나 사실이 아님이 밝혀졌다. 대어를 낚을 것을 기대했던 조사팀 일부는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오닐 의장의 수난은 그러나 쉬 가시지 않았다. 박동선이 조지타운클럽에서 베푼 오닐 생일 축하 향연이 뇌물에 해당하느냐가 문제가 됐다. 의장실 참모진이 강력히 반발, 조사가 지연됐다. 하원의장이 조사대상이 됐다는 기사가 신문에 게재되자 의장실은 조사에 협조해야 했다. 누가 이 사실을 언론에 흘렸는가 짐작은 되지만 확증은 없고 기자가 취재원을 밝힐 일은 없다. 워싱턴의 전설적인 리-크 작전이 가동됐고 조사팀은 의장에게 접근할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의장은 책임이 없는 것으로 낙착됐다.
-지하실에 감옥이 있다던데
1793년 건립이 시작된 워싱턴의 캐피톨(의회)은 역사적 일화도 많고 수수께끼도 많다. 박동선이 의회 증언차 미국에 온다는 말이 무성할 때, 혹 그를 구속할 필요가 생기면 어찌하느냐는 논의가 생겼다. 그때 의사당 지하에 감금시설이 있다는 설이 나왔다. 그리고 그 옆에는 조지 워싱턴을 위해 만든 무덤자리도 있다고. 나는 어느 날 호기심으로 지하 탐방을 시도했으나 무참히 실패했다. 지하실 계단도 못 찾고 의회 경찰이 나를 뒤쫓기 시작해서였다.
-불우한 맥펄 의원의 모습
1978년도 저물어 가는 어느 날 정오, 나는 롱워-즈 하원 의원회관 카페테리아의 긴 줄에 서 있었다. “핼로-” 하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존 맥펄 의원이었다. 의원 경력 22년, 그는 얼마 전까지 장래 하원의장으로 촉망되는 원내 다수파인 민주당 원내부총무였다. 허나 그는 그 해 11월 초 선거에서 낙선, 며칠 후면 국회를 떠나야 할 입장에 있었다.
박동선이 건넨 현금 4,000불을 사적으로 썼다 해서 징계처분을 받고 낙선한 그는 받은 돈 가운데 2,000불은 자동차를 산다기에 딸에게 줬다고 고통스럽게 조사팀에 진술했다. 내 뒤에 꼿꼿이 서서 자기 순서를 기다리는 불우의 정치인의 존재가 지금도 눈에 선하다.
-M 여기자의 엉터리 정보
해리 G.조사관은 한국 사람만 만나면 자동차 번호를 기록했다. 개인 신상 파악이 최고 정보 소스라고 그는 믿고 있었다. 그런데 이 노련한 FBI 특별요원이 M 모라는 한국계 여기자가 흘리는 날조 정보, 미확인 정보에 휘둘렸다. 희귀한 정보라고 흡족히 받아들여 해리 H.가 작성한 허황한 정보 보고서에 나는 자주 토를 달았지만 M 기자의 농락은 계속됐다.
M이 제공한 첩보 한 가지: “행방을 찾고 있던 김대중 납치 동경 책임자 김 모 정보 공사가 LA에서 목도됐다는 정보 입수. 그는 가발을 쓰고 여인으로 변장, 홍수로 파괴된 공동묘지를 배회하고 있었다고 한다.”
-조사팀의 연말파티
1978년이 저물어 가면서 미 제95대 의회도 끝을 달려가고 있었다. 윤리위 조사팀도 짐을 꾸리며 크리스마스 전날 의회 근처의 한 조촐한 식당에서 연말 기념과 해단식을 겸한 만찬 모임을 가졌다. 화제는 자연히 두해에 걸친 조사활동에 따른, 그러나 기록되지 않은 일화로 꽃을 피웠다.
제퍼리 H.검사는 패스맨 전 의원의 시계 구입, 은행 거래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홍콩으로 날아갔다. 그리고 타국 영토에서 사법관 행세를 했다. 국제법 위반이었다.
리처드 P.조사관은 도피중인 개러가 의원에게 소환장을 교부하는 임무를 맡았다. 소환장은 본인에게 직접 전해야 한다. 리처드는 3일 동안 개러가의 주택 앞 나무 꼭대기에 앉아 기다렸으나 그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고, 충실한 경관 출신인 리처드는 실의 속에 돌아왔다.
각 가지 일화가 만발하는 가운데 존 N. 수석 검찰은 즉흥적으로 이 이야기들을 시에 담았고, 최연소 여검사 마-사 T.가 기타 반주에 맞추어 발라드를 노래했다. 흥이 절정에 달하고 이제 헤어질 때가 되었을 때 내가 일어섰다. 호기심에 찬 눈으로 쳐다보는 동료들에게 내가 조용히 말했다.
“이제 내 정체를 밝힐 때가 왔다. 실은 나는 당신네 조사팀에 잠입해 암약해 온 KCIA 비밀 요원이다.” 순간 짜릿한 침묵이 흐르고… 수석 검사 존 N.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웃기지 말라. 우리는 다 알고 자네를 채용했다. 당신을 통해 숱한 역정보가 한국에 들어갔지.”
좌중은 폭소와 갈채로 뒤덮이고, 마-사 T. 검사는 건네받은 쪽지를 보며 기타를 튕겼다.
“Well the ROK ought not to bribe again/ But Koreans themselves are O. K./ We would want Hong in our tribe again/ Even if he were K. C. I. A.” <정리 이종국 기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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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 이종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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