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F, 미래에서 온 이야기] SF 작가들의 산파 케이트 윌헬름
▶ 상업성과 거리 둔 독자적 글쓰기, 변화하는 인간에 대한 통찰 독보적
케이즈 윌헬름의 작품들.
케이트 윌헬름
작가와 작가 지망생의 차이는 글을 읽어주는 이가 있는지 여부다. 많은 작가가 지망생 시절 숱한 거절을 받으며 자신이 진정으로 작가가 될 수 있을지, 어떤 글을 써야 세상에 받아들여질지 불안하고 앞이 깜깜했다고 회고한다. 케이트 윌헬름은 SF 작가들이 이런 불안을 홀로 감당하지 않도록, 실제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평생을 공헌한 작가다. 그녀는 습작을 쓰던 시절 작가란 매우 특별한 존재라서 자기는 작가가 될 수 없으리라고 믿었던 탓에 너무 먼 길을 돌아와야 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래서 남편 데이먼 나이트와 함께 작가를 양성하고 지원하는 ‘클라리온 워크숍’을 설립했다. 옥타비아 버틀러, 테드 창, 브루스 스털링, 코리 닥터로우 등이 모두 클라리온을 거쳐 SF 작가가 된 졸업생이다. 비록 국내에서는 케이트 윌헬름보다 제자들이 더 유명하지만, 그녀는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작가들의 이정표가 된 선구자이고, 아흔의 나이에도 자기 출판사를 운영하며 신간을 내고 있는 모범적인 작가다.
■느리고 아름다운 이야기
케이트 윌헬름을 타고난 이야기꾼이라 부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그녀는 어린 나이부터 두각을 드러내기보다는 시간을 들여 쓰고 읽고 다시 쓰면서 차츰 완성된 작가다. 오히려 반짝 성공한 천재가 아니기 때문에 다른 이들을 적절히 지도할 수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열아홉 살에 결혼해 전화상담원, 보험 외판원, 판매원, 모델 등을 전전하며 아이 둘을 기르다 서른 즈음에야 작가로 데뷔했다.
글쓰기를 독자적으로 익혔기 때문인지 케이트 윌헬름의 글은 ‘보통’의 틀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평을 주로 받았다. 무난한 SF를 쓰던 초기와 달리 자기 확신이 생긴 뒤로는 작가로서 쓰고 싶은 글을 추구했던 결과였다. 그녀의 소설은 두 가지 면에서상업적으로 성공하기에 부적합했다. 길이 면에서, 케이트 윌헬름은중편 분량의 작품으로 두각을 드러냈다. 그러나 중편은 단편집에 수록하기에는 부담스럽게 길고 독립적으로출간하기에는 애매하게 짧아서 인지도를 확보하기가 어렵다. 그리고 장르 면에서, 그녀는 성실한 SF 작가가 되기에는 지나치게 넓은 시야를 갖추고 있었다. 본인의 말에 따르면 그녀의 작품은 “너무 자주 ‘이쪽 시장’이나 ‘저쪽 시장’을 빗나가 그 사이로 떨어졌”다. 처음 네뷸러상을 수상한 단편 ‘플래너스(The Planners)’(1968)는 그럭저럭 SF이지만, ‘바바라 할로웨이(Babara Holloway)’ 시리즈는 여성 변호사가 주인공인 법정 미스터리고, ‘오, 수재너(Oh, Susannah)’(1982)는 기억상실과 시간여행과 고양이가 등장하는 로맨틱한 익살극이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을 중간지대에서도 케이트 윌헬름은 계속 글을 썼고, SF와 미스터리 외에도 판타지, 서스펜스, 만화, 라디오드라마, 시집, 수필 등 50권이 넘는 책과 100편이 넘는 단편을 발표했다.
이런 까다로운 특성 때문에 한국에는 케이트 윌헬름의 SF가 ‘노래하던 새들도 지금은 사라지고’ 한 권밖에 소개되지 않았다. 중편 세 편으로 구성된 이 책은 1977년 장편으로 묶인 뒤 휴고상, 로커스상, 주피터상을 수상하고 네뷸러상 최종 후보에 올랐다. 이 소설은 그녀의 대표작이라고는 해도 독창적인 아이디어로 빛나는 작품은 아니다. 가까운 미래에 전염병, 환경오염, 기후변화, 방사능으로 인류가 멸망한다는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그때에도 새로운 분야는 아니었다. 그러나 케이트 윌헬름은 피라미드의 꼭대기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시대를 예언하기보다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정한 시간에 세심하게 초점을 맞춘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그녀에게 인간은 기존의 모든 성취를 잃어버린 다음에도, 숲이 속삭이는 소리와 강이 흐르는 소리를 들으며 느리지만 꾸준히 다시 거듭나는 존재다. 역경 앞에서 변화하는 인간에 대한 통찰은 지금 보기에도 독보적이고 아름답다.
■작가가 작가로 되는 곳, 클라리온
클라리온 과학소설 창작 워크숍은 본래 밀포드 지역 작가 워크숍에서 출발했다. 케이트 윌헬름은 누구보다 방황했던 만큼 상호 교류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고, 데뷔 후 몇 년 지나지 않아 적극적으로 워크숍을 운영하는 기획자가 되었다. 남편 데이먼 나이트 역시 왕성하게 활동하는 비평가이자 편집자, 작가로서 창작자 네트워크를 만드는 데 열성적이었다. 이 부부의 워크숍은 후원자를 만나 클라리온 주립대학으로 옮겨가면서 지금의 ‘클라리온’이 됐다.
클라리온 워크숍은 강사(작가)와 학생을 각 성향에 따라 연결해준다는 점과, 모든 사람이 6주간 합숙을 한다는 점이 특징이다. 강사에게는 자신이 체험한 바를 공유하며 동료 작가를 양성한다는 면에서, 지원자에게는 SF 작법을 이해하는 사람들과 밀도 높은 작품 활동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인기가 있다. 무엇보다 완성한 작품을 게재하기가 쉬워진다는 것이 장점이다. 옥타비아 버틀러는 클라리온에서 처음으로 남이 자기 글을 사주는 경험을 했다고 썼다. 20세기 중반에 사교성 없는 가난한 흑인 여성이 SF 작가가 되기로 마음먹기 위해서는 그런 경험이 필요했다. ‘파트타임’ 작가면서 발표하는 작품마다 족족 수상하기로 유명한 테드 창도 클라리온에서 데뷔작을 썼다.
■케이트 윌헬름 솔스티스상
미국 SF 및 판타지 작가협회(SFWA)는 데이먼 나이트가 창립한 초기에는 소수에 불과했지만 현재는 작가, 비평가, 편집자 등 1,800여명이 모인 장르 최대의 비영리단체가 되었다. 협회는 창작자 보호, 계약상 분쟁 해결, 응급 의료 기금 운용, 정기간행물 발행, 그리고 매년 네뷸러상을 시상하는 등의 사업을 책임지고 있다. 네뷸러상의 상패는 이름대로 성운(nebula)이 들어간 모양으로, 케이트 윌헬름의 스케치를 바탕으로 제작된 것이다. 협회는 또한 데이먼 나이트 그랜드 마스터 기념상, 케이트 윌헬름 솔스티스상을 시상한다.
케이트 윌헬름 솔스티스상은 SF와 판타지의 풍광을 가장 긍정적으로 변화시킨 사람에게 수여된다. 솔스티스(solstice·지점)는 하지나 동지처럼 지구의 자전축이 태양에서 가장 멀거나 가까운 때를 뜻하는 말로, 매년 한 해의 변화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솔스티스상은 작품 위주의 다른 상과 달리 장르 전반에 공헌한 정도를 고려한다는 점이 특징이다. 칼 세이건처럼 과학자이자 창작자였던 사람을 포함해 여러 편집자, 기획자 등이 이 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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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완선 SF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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