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태자,‘#82’
아직은 이른 저녁
참으로 이런 눈은 오래간만이라서
집으로 그냥 돌아갈 수는 없어서
한 잔의 생맥주를 혼자서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길을 첫 번째로 꺾게 하고
다시 눈 내리는 숲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이 길을 두 번째로 꺾게 했다
그동안 내가 겪었을
눈 내리는 밤의 다른 추억들도
내리는 눈으로 다 지워지고
그렇게 눈 내리는 숲으로만 갔다
그렇게 가서 나도
한 그루 가문비나무로 서 있게 되었다
붙박이로 서 있게 되었다
눈 내리는 숲이 되었다
즐겁게 그쪽 몸이 되는
즐겁게 그쪽 몸이 내 몸이 되는
아름다운 굴종을 알았다
네가 어서 와서
그렇게 나를 안아주길 기다린다
정진규(1939-2017) ‘눈 내리는 저녁’
눈 내리는 저녁, 문득 세상의 길을 잃고 싶은 사람이 있다. 한 번의 우회, 그리고 또 한 번의 우회, 그래서 그가 다다르는 곳은 눈 내리는 숲이다. 시끄런 세상에서 아주 먼 곳, 한 그루 가문비나무가 오롯이 내리는 눈을 맞고 있는 곳이다. 이제 이곳에 밤이 오리라. 몸 하나로 서로를 향해 새하얀 불을 밝히는 아름답고 착한 굴종의 시간이 오리라. 삶의 고요한 오지에 내리는 눈이여, 당신의 생애 어디쯤에서 그런 저녁을 만난다면 당신 또한 따라 나서지 않으시겠는가. 가서 가문비나무처럼 하얗게 당신의 연인을 기다리지 않으시겠는가. 임혜신<시인>
<
정진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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