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한국에서 ‘대한민국 인생등급’이라는 책이 발간돼 화제와 논쟁을 불러일으킨 적이 있다. 이 책은 한국의 교육현실을 날카롭게 꼬집으면서 직업과 학력을 기준으로 9단계 등급을 매겨 논란을 촉발했다. 책의 분류에 따르면 1등급 대한민국 국민은 대통령과 세계적 석학, 그리고 인구 500만 명 이상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사람들이며 9등급은 의무교육 수준만 마친 사람들이다. 인간을 어떻게 정량화된 등급으로 나눌 수 있느냐는 반발이 만만치 않았지만 한국사회의 현실을 제대로 꼬집은 것이라는 반응도 많았다.
타당성을 떠나 이런 등급매기기는 서열화의 극단적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원래 나누고 분류하길 좋아하는 게 인간이라지만 한국사회의 서열화 문화는 유독 심하다. 신분제 의식이 여전히 뿌리 깊게 남아 있는데다 교육 자체가 이런 방식으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이런 문화의 부산물, 아니 자연스러운 결과가 등급매기기의 일상화이다. 2년 전 한국사회를 휩쓸며 수많은 젊은이들을 절망에 빠뜨린 ‘수저계급론’은 이런 풍조를 자조적으로 표현한 것일 뿐이다.
시장에서의 가치는 등급으로 확인되고, 반대로 시장에서 매겨지는 등급이 가치를 결정하기도 한다. 결혼시장이 대표적이다. 결혼정보회사들은 직업 외모 나이 등 다양한 요소들을 집어넣어 점수를 산정한다. 사회적으로 선망 받는 직업이면 당연히 좋은 점수가 주어지고 외모가 떨어질 경우 점수를 조금 깎는 식이다. 이렇게 해서 회원 등급을 10여개로 나눈다. 결혼정보회사들은 매치메이킹을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식이라고 두둔하지만 사람에 등급을 매기는 데 대한 씁쓸함과 불편함이 없을 수 없다.
결혼정보회사에 등록하는 것은 그나마 등급 분류에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경우다. 하지만 당사자의 동의 없이, 혹은 의사에 반해 등급이 부여된다면 당연히 불쾌한 일이 될 것이다. 특히 그런 등급이 가치관에 대한 것이라면 더욱 용납할 수 없는 행위다.
한국의 한 공영 TV방송 카메라기자들이 그동안 사측이 자신들에 대해 ‘충성도 등급’을 매겨왔다고 주장하는 기자회견을 가졌다. 이들은 방송사가 ‘충성도 높은 기자’에서부터 ‘현 체제 붕괴를 바라는 이들’에 이르기까지 ☆☆, ○, △, X 등 4등급으로 나눠 관리해 왔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기자들은 자신들은 등급을 매길 수 있는 소고기가 아니라고 항변했다. 만약 사실이라면 독재시절을 연상시키는 몰지각한 등급 분류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사회 분위기의 영향 탓인지 우리 주변에는 등급 매기기에 유독 능한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들이 생각하는 등급에 따라 상대를 대하는 태도를 달리한다. 그 기준은 물론 외형적인 조건들이다. 이런 등급 매기기에서부터 차별은 시작된다.
성현들은 이런 태도를 경계했다. 인간의 수준을 말해주는 것은 외형적 조건이 아니라 오직 됨됨이 뿐이라고 가르쳤다. 그래서 ‘자치통감’을 지은 사마광은 이를 기준으로 ‘성인’과 ‘군자’, ‘소인’과 어리석은 ‘우인’으로 나누고, 재주는 조금 있는데 가치는 천박한 ‘소인’을 가장 바람직하지 못한 유형으로 봤다. 오늘의 한국사회는 됨됨이로 봤을 때 어떤 유형에 속할까? 사마광에게 ‘한국사회의 등급’을 살짝 묻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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