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10월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됐다.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가에서 김재규 중앙정보부 부장에게 저격을 당한 것이다.
10.26 사태, 12.12 사태, 5.17 사태…. 비상사태에서 비상사태로. 정국은 요동쳤다. 그 가운데 한 가지 음모론(conspiracy theory)이 시중에 나돌았다. 박 대통령 암살배경을 둘러싸고.
미국과의 관계가 상당히 안 좋았다. 당시 미국 대통령은 인권정책을 내건 카터였다. 박 대통령은 그 카터와 사사건건 부딪혔다. 거기다가 미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었다. 워싱턴은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그래서 벌어진 게 궁정동의 비극이라는 것이다.
미국 사주 설은 단지 음모론일 뿐이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사실인 양 받아들였다.
1975년 4월30일 월남 패망의 날. 그날의 광경은 아시아의 미국맹방들에게는 충격의 날이었다. 월맹의 탱크가 사이공 대통령관저 독립궁을 부수고 월맹깃발을 올렸다. 미국 대사관 옥상에서는 탈출하려는 난민을 태운 헬기가 바람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 장면이 TV를 통해 그대로 방영됐던 것이다. 이와 동시에 미국에 대한 아시아맹방들의 신뢰는 급격히 떨어졌다. 그리고 한 가지 확신을 가져다주었다. 자주국방 강화만이 공산침략을 막아내는 길이라는.
1970년대 후반. 한국은 핵무기개발에 착수했다. 물론 비밀리에. 대만도 뒤따랐다. 일본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았다. 이 같은 아시아맹방들에게 미국은 당근과 채찍을 모두 구사했다. CIA가 나서 증거를 잡아내고 압력을 가하는 한편 안보 공약을 강화하기도 했다.
한국의 핵무기개발노력은 박 대통령 사후 1980년에도 계속 이어졌다. 미국은 주한미군 철수 연기라는 당근을 제시하면서 그 노력을 중지시켰다. 대만의 핵무기 개발노력도 미국의 압력으로 80년대 들어 멈추어졌다.
패스트 포워드.(Fast Forward) 2017년 8월 현재. 무대는 역시 동북아시아. 또 다시 핵무기 경쟁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북한 핵 무장이 그 원인을 제공하고 있다.
핵 실험만 다섯 차례 했다. 6차실험이 목전에 있다. 거기다가 미국 전역을 사정거리에 둔 대륙간탄도탄(ICBM)실험발사에 성공했다. 핵탄두가 장착된 북한의 장거리미사일이 LA는 물론, 뉴욕에 날라들 날이 멀지 않은 것이다.
70년대에는 미국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동북아지역에서의 핵 확산을 막았다. 40여년이 지난 오늘의 상황에서는 그 책임이 중국에 있다는 것이 서방측의 주장이다. 다름이 아니다. ‘막가파’ 식으로 핵에 ‘올인’하는 북한을 저지할 책임이 있다는 거다.
중국의 태도가 그런데 석연치 않다. 핵무장 북한은 미국과 대립관계에 있는 중국의 전략적 이해에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적극적으로 말릴 생각이 없다는 거다.
그 결과는 뭘까. 핵을 저지하는 것은 핵이다. 한국이 핵으로 갈 수 밖에 없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되면 호주의 핵무장도 시간문제다. 대만도 뒤따른다. 아시아에서 핵 도미노현상이 벌어지고 마는 것이다. 과연 그런 상황이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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