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필을 깎는 동안
나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없이
아내도 새끼도 없이
대구 뉘 집인지 모를 데를 기웃거린다
아주 오래 깃들여 산 듯이
마당부터 마루부터 부엌부터가
반질반질 눈에 익다
붉고 따뜻한 아궁이 불이 자서
부뚜막이 알맞게 식고,
불 켜진 방에는 인기척이 없다
그러나 무슨 심산가
정작 집에 닿아서는 집을 등지고
세상의 불빛 아득히 건너다본다
먼 어둠 너머
나를 등지고 내게로 돌아오는
연필을 깎는 동안
부뚜막이 알맞게 식은 부엌을 가진 집, 반질 반질 눈에 익은 인기척 없는 집은 누구의 집일까. 그 집은 아주 오래 전 우리가 등지고 떠난 과거의 집이며, 그 누구의 것도 아닌 우리들 모두의 영혼 속에 지어 진 ‘인간의 집’이다. 연필을 깎는 아무 것도 아닌 시간에 찾아온 이 쓸쓸한 풍경이 영혼의 먼 본향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본향을 향한 죄의식과 사랑과 그리움 속으로. 그리고 거기 짧고 깊은 외로움 속에서 생은 고요히 피어난다, 어둠 속에서 불꽃이 문득 피어나듯이. 그리고 그렇게 사라지듯이.임혜신<시인>
<
이 안 (1967 ~ )>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