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는 피바람 속에 세워졌다. 정몽주를 죽이고 조선의 왕이 된 이성계는 남은 고려의 충신들을 포섭하기 위해 애를 썼지만 이들은 경기도 개풍군에 있는 두문동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이들을 쫓아내기 위해 불을 질렀으나 이들은 끝내 불타 죽는 길을 택했다. ‘두문동에 들어가 나오지 않는다’는 뜻의 ‘두문불출’은 이 때 나온 말이다.

이성계가 죽인 것은 이들만이 아니었다. 신하로서 반역을 감행해 왕이 된 이성계는 항상 왕족인 왕씨가 두려웠다. 언제 이들이 들고 일어나 자신이 역적으로 몰릴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설상가상으로 조선 초 왕씨는 가장 수가 많은 성씨의 하나였다. 고려를 개국한 왕건이 지방 호족들을 포섭하기 위해 그 딸을 무더기로 왕비로 삼는 바람에 정식 부인만 28명인데다 그 외 여자들로부터도 수많은 자식을 낳았다. 거기다 개국에 공을 세운 부하들에게 왕씨 성을 상으로 내리기도 했다. 그 결과 수도 개경은 ‘두 집 건너 한 집이 왕씨’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왕씨가 많았다.

이성계는 이들에게 섬으로 이주시켜 살게 해주겠다며 배를 태운 뒤 수장시키는 수법을 썼다. 그 결과 김씨 만큼 많던 왕씨는 지금 한국에서 희귀성의 하나가 될 정도로 줄어들었다.

조선의 피바람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태조 뒤를 이어 권력을 잡은 이방원은 이복 동생은 물론 나중에 자신의 집권에 공을 세운 처가집 식구들과 사돈까지 모조리 죽였다. 자신과 후계자의 왕권을 위협하는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서였다.

세종의 아들 수양은 조카 단종과 친동생 안평대군을 죽였고 광해군은 적자이자 자신의 이복 동생인 영창 대군과 친형 임해군을 살해했다. 사극에 임해군이 “나는 아무 잘못도 없는데 왜 죽어야 하느냐”고 묻자 암살자가 “형이면서 왕이 못 된 것이 죄”라 답하는 장면이 나온다.

조선 500년은 권력을 위해 형제가 형제를 죽이는 잔혹사의 연속이었다. 이번 말레이시아에서의 김정남 암살은 아직 한반도 북쪽에서는 조선 시대가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한국 안보전략 연구소에 따르면 2011년 김정은이 집권한 후 지금까지 340명이 처형되거나 숙청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중에는 한 때 북한의 2인자였던 장성택도 포함돼 있다. 김정남의 뒷배를 봐주던 그는 자신의 측근들이 고사포로 사살된 후 화염방사기로 불타는 것을 지켜보게 한 뒤 같은 방식으로 처형된 것으로 알려졌다.

사실 2013년 장성택 처형 후 김정남의 운명은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다. 한참 어린 동생 김정은에게 목숨만 구걸하는 편지까지 보냈으나 소용없었다. 김정남이 암살된 이유로 여러가지 설이 나오고 있으나 답은 간단하다. 임해군처럼 형이면서 왕이 되지 못한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김정은 입장에서 김정남은 살려둬 아무 득이 될 게 없는 인물이다. 만에 하나 북한 권력층 일부가 불만을 품고 친중 쿠데타를 일으킨다면 그 중심으로 떠오를 1순위 인물이 김정남이기 때문이다. 김정남이 집권하는 날 김정은 일가는 즉각 총살되거나 그 좋아하는 스위스 치즈는 찾아 볼수도 없는 아오지 탄광에서 일생을 보내게 될 것이 너무나 뻔하다.

김정남이 제거된 지금 다음 타겟은 그의 아들 김한솔이 될 것이다. 그 또한 김정은 입장에서는 살려둘 수 없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죽이지 않으면 죽어야 하는 조선 시대의 비극은 한반도 북쪽에서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