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사는 이야기/뉴욕 한인의 날&미주 한인의 날 행사준비위원장 찰스 윤 변호사
외교관 아버지따라 세계각국서 학창시절
무료법률상담은 법 공부한 사람으로서 재능기부
한인회 연례만찬 준비위원장 맡아 성공리 개최
그는 1.5세 한인변호사다. 한인사회의 힘은 참여에 있다고 여긴다.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의 가교 역할에 앞장서는 이유다. 그는 뉴욕한인회 연례만찬의 단골 준비위원장이다. 뉴욕한인회 50주년과 51주년 기념 연례만찬을 성공적으로 마무리 했다. 한국과 미국 정치, 경제, 사회계 주요인사 1,000명 이상이 참석해 대성황을 이룬바 있다.
한인의 위상을 널리 알리는 훌륭한 기회로 삼았다. 한인 1,5, 2세들도 대거 참석해 한인회의 미래를 더욱 밝게도 했다. 그런 경험을 토대로 이번에도 뉴욕 한인의 날 & 미주 한인의 날 준비 위원장을 맡았다. 그는 한인사회의 참여와 성원이 중요함을 강조하는 찰스 윤(53, 한국이름 명식) 변호사다.
외교관의 아들
그는 1963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1남1녀의 막내. 아버지는 미국 유학파로 연세대 교수를 지내다 외교부에서 일한 외교관이다. 어머니는 서울 음대 출신. 어린 시절은 아버지가 외교관으로 근무하던 세계 각국을 오가며 생활했다. 유아기 2년은 브라질에서 보냈다. 그 후 태국, 시카고, 아프리카 카메룬, 스리랑카 등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녔다. 한국에서는 유치원과 중앙대학교부속 초등학교에서 3-4학년을 보냈다.
외국에서의 학장시절은 새로운 친구들과의 짧은 만남과 잦은 이별이 반복됐다. 각기 다른 언어와 문화적응도 쉽지 않았다. 그렇지만 어릴 때부터 다양한 나라의 문화를 접하며 견문을 넓히고 적응력을 키울 수 있었다.
어린 시절 장래 희망으로 과학자나 발명가를 꿈꿨다. 호기삼이 많고 기계를 고치는 등의 손재주가 뛰어났기 때문이다.
1978년 미국으로 유학을 왔다. 뉴저지 로렌스빌 보딩 스쿨에서 고교생활을 했다. 남학생들만 다니던 학교라 텃새로 다툼이 많았다. 체격을 작았지만 불의를 참지 못하는 성격 탓(?)에 자신과 동급생들을 보호하는 차원에서 학교에서 ‘무도’ 수련을 했다. 활동이 미미했던 '당수도 클럽"을 학교에서 가장 활동적인 클럽중 하나로 발전시킨 것이다. 어린 시절 배운 태권도 덕분에 유단자의 실력도 쌓을 수 있었다. 졸업 반 때는 사범으로 학생들을 1년 동안 가르치기도 했다. 덩치가 산만한 학교풋볼선수가 ‘보디가드’를 해달라는 요청을 받을 정도의 명성을 떨쳤다. 공부 잘하는 주먹 ‘짱’으로 사춘기를 남자답게 보낸 셈이다.
고교시절엔 역사과목과 불문학을 좋아했다. 시와 소설 등 문학도 좋아했다. 휘문학교 교장을 역임한 외할아버지가 전공한 ‘철학’에 관심을 두고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컬럼비아 대학에 진학해 ‘비교문학(불문학)’과 ‘정치학(정치이론’을 복수전공한 이유다.
법을 공부한 이유!
그는 다양한 진로를 모색하기 위해 컬럼비아 대학 로스쿨에 진학했다. 졸업 후에는 바로 미국 대형 로펌인 ‘Thelen Reid & Priest LLP'에 취직 약 14년 간 그 곳에서 잔뼈가 굵었다. 입사 9년 만에 한인 최초로 소송분야 파트너 변호사가 됐다. 그 후 2007년에 제이 김 변호사와 함께 기업분쟁 소송과 중재전문인 ’Yoon & Kim LLP'를 설립했다. 현재는 스티븐 유딘, 최지일 변호사 등 파트너 변호사 4명을 포함 8명의 변호사로 구성된 로펌으로 성장했다.
그는 한국 대기업과도 인연이 깊다. 현대중공업, 삼성물산, 코오롱 등 한국 기업의 법률자문과 변호를 한 경험이 있다. 미국에서 소송을 당해 현실적으로 언어 등 다양한 측면에서 힘든 상황을 겪게 되는 처지에 놓인 한국 기업들에게 도움을 준 것이다.
은행관련 업무, 기업 분쟁과 한국기업 법률 자문 등의 전문변호사인 그는 그 동안 무료 법률 상담 등 한인사회 무료봉사에 공을 많이 들였다. 변호사 회장 당시에는 뉴욕한인직능단체장 협의회에 가입해 의장을 맡기도 했다. 직능단체 대상으로 노동법 세미나 등 법을 공부한 사람으로서 ‘재능기부’ 봉사에 나선 것이다. 법률 지식을 통해 한인들을 도와주고 있는 것은 현재도 진행형이다.
그가 ‘법률지식 재능기부’를 꾸준히 하는 것은 로스쿨 진학의 이유이기도 하다. 평소 인권에 관심이 많아 법을 공부한 이유가 바로 법을 통해 사람을 도와주는 일을 하고 싶은 마음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문호개방과 영토 확장
그는 1990년대 말부터 세계한인변호사 협회에서 활동했다. 2004년부터는 2년 임기의 회장도 맡았다. 세계 각지에서 활동하는 한인 법조인들과 함께 활발한 교류를 통해 친목과 정보를 교환하고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한인들의 인권을 보호하는 활동은 한 것이다.
그 후 뉴욕한인변호사협회 회장도 역임했다. 1년의 임기를 연임하면서 2년 동안 회장으로 활동했다. 초심을 잃지 않고 주류 사회에 진출한 한인변호사들이 한인사회에 일익을 담당할 수 있는 가교 역할을 충실히 했다. 당시 맨하탄에 집중된 회원들을 퀸즈와 뉴저지 지역까지 확대했다. 한인 변호사 모두가 동참할 수 있도록 문호를 개방한 것이다. 연례만찬을 통해 미 법조계와의 유대를 강화하면서 영토도 확장했다. 한인사회에서 무료법률상담을 실시했고 법조인들의 정치력 신장에도 적극 나섰다. 신임 한인변호사들에게 선배 변호사들이 멘토로 앞으로의 법조계 생활을 하는 데 큰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했다.
제31대 뉴욕한인회(회장 하용화)에서는 상임부회장을 맡았다. 그 당시 한인 1.5세, 2세들의 젊은 변호사들이 적극 참여해 열심히 일하는 데 선봉장 역할을 했다.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들 간의 가교역할도 성실히 했다. 인맥을 바탕으로 참석자 1,000여 명이 넘는 뉴욕한인회 연례만찬도 두 차례 성공적으로 치렀다. 그 어느 때보다 참여가 돋보였던 1.5세, 2세들 그룹의 단연 선두주자로 제 역할 이상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다.
현재 내년 1월에 있을 뉴욕한인의 날과 미주한인의 날 행사의 준비 위원장으로 뛰고 있다. 이번 행사의 목적은 그동안 분열된 모습으로 실추된 뉴욕한인회의 이미지를 고취시키는 위상 정립에 두고 있다. 올해의 인물 수상자들을 축하하는 자리도 마련한다.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들이 함께 참여해 서로 존경과 격려를 하는 화합의 장도 꾸미고 있다. 뉴욕한인회 이민사전시관 설립을 위한 기금모금 캠페인도 병행한다. 문을 활짝 열고 한인 모두가 적극 참여하고 적극 성원해 줄 것을 당부하는 이유다.
그는 “한인사회의 힘은 바로 참여에 있습니다. 이번 행사에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를 아우르는 모든 한인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기성세대들에게는 주류 사회에서 활동하는 자녀들과 함께, 젊은 세대들에게는 부모님과 함께 참여하도록 전략을 펼치고 있는 중”이라고 귀띔한다.
명품 변호사.
그의 변호사 철학은 사건준비에 필요한 충분한 검토와 조사 후에 사건을 진행함으로써 고객에게 가장 효율적인 서비스를 제공하는 데 두고 있다. 오랜 기간이 걸리더라도 고객이 포기하지 않도록 하며 끈질기게 사명을 다해 완벽한 승소로 이끌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런 조사와 연구는 고객과 법정에서 신뢰도를 높이는 바탕이 되고 있다. 그의 보람은 정의가 필요한 고객을 위해 정의를 성취해 줄 때다.
그는 ‘생사’와 같은 갈림길에 놓인 개인과 기업들의 변호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지만 오히려 승소를 위한 연구를 통해 스트레스를 풀고 있다고 한다.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더 공부하고 연구하는 노력의 생활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변호사는 평생 공부하는 직업으로 여기고 공부하지 않는 변호사는 시한폭탄과 같다고 생각하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삶의 철학도 자기 자신을 계속 발전시켜 나가는 데 두고 있다. 은퇴연령이 따로 정해지지 않은 변호사로 활동하는 만큼 몸이 허락해 일하는 동안에는 공부를 하면서 자신의 실력과 인품을 쌓아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Yoon & Kim LLP'가 아시아 태평양 변호사협회로부터 2016년 올해의 아시아 태평양계 로펌으로 선정됐다. 대형로펌 파트너 출신의 업무능력과 차별화된 한국어 구사능력 및 문화 이해를 바탕으로 이전까지 대형로펌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주요 사건들에게 여러 한인, 아태 커뮤니티 고객을 대리해온 결과다. 최고의 업무능력과 도덕성을 바탕으로 명성을 얻고 아시아 태평양 커뮤니티에 기여한 공적이 인정된 셈이다. 그는 외모에 반하고 한 눈에 평생 동반자란 감정을 느낀 안과의사 아내와 2000년 결혼했다. 슬하에는 세 딸을 두고 있다.
자신의 수양 쌓기에 정진하며 가정에 충실한 가장으로서 그리고 사회봉사를 실천하며 살고 있는 그는 남은 인생도 지금과 같은 생활과 더불어 신앙심을 좀 더 기르고 남을 위한 봉사에도 더욱 힘을 쏟고자 한다.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균형과 조화로운 삶을 행복이라 여기며 주님이 주신 인생이란 기회를 알차고 의미 있게 살 수 있으면 삶의 목적을 성취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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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창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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