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차 한잔의 초대/ 한미현대예술협회 창립자 최대식
<사진=이경하 기자>
후배들에 기회 주고싶어 한미현대예술협회 창립
총 50여회 개인전...작품주제는 한결같이 ‘자연의 소리’
어디서 무엇을 하건 작품에서 손 놓은적 없어
늘 뭔가 획기적인 전시회를 기획하는 가하면 어느새 완성된 작품을 수북하게 내놓는 한미현대예술협회 창립자 최대식, ‘한참 재미있게 놀다보니 칠십이네’ 하는 그의 삶을 들여다본다.
●발표기회를 주자
최대식 한미현대예술협회 창립자, 그는 지난 수개월간 한국에 나가있으면서 ‘한참 재미있게 놀다보니 칠십이네’를 타이틀로 한 초대전을 열고 11월말 뉴욕으로 돌아왔다.
목동 현대백화점 갤러리H, 용산구 갤러리 U.H.M 초대전, 전북 완주군의 오스 갤러리, 오스 문화카페, 아원, 완주군청 어울림 커뮤니티, 전주시의 오스 스퀘어 등 이번 가을에 7곳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전시회를 거의 동시에 하다보니 전시작품만 500여 점으로 반은 조각, 반은 콜라쥬였다. 이 방대한 작품량이 말해주듯 그는 참으로 ‘바지런한 사람’이다.
최대식, 그는 자신의 작품 이야기보다 먼저 한미현대예술협회에 대해 말하고 싶어한다. “당시 한인작가들을 위한 아트 비영리단체가 없었다. 처음엔 몇 사람이 모여 서로 작품에 대해 격려하고 후배 작가 양성과 발표기회를 주는 전시회를 열어 한국 작가들을 주류사회에 알리자는 동기로 출발했다.”
최대식은 1998년 출범한 한미현대예술협회(The Korean American Contemporary Arts) 창립자겸 회장을 3회 하면서 맨하탄 32가에 갤러리 32를 열어 상설 전시장 겸 사무실을 열기도 하는 등 기반을 단단히 다져놓았다. 현재 협회는 17년 역사 동안 50회 이상 정기전시회를 해왔고 뉴스레터 212호가 나왔을 정도로 꾸준히 성장해오고 있다.
“1년에 4개정도의 도록 출간, 청소년미술공모대전, 국제공모전, 이민100주년기념 그룹전 및 도록 제작 등이 주요사업이었고 2004년 한미예술협회 현대아카데미를 열어 음악, 미술, 무용 등 다양한 강좌를 열기도 했다.” 발품을 넓게 팔던 그의 재미진 인생을 들여다보자.
●좋은 스승을 만나
최대식은 1946년 6월 부산 수정동에서 출생했다. 부산 시장이던 외할아버지, 소문난 땅부자인 친할아버지, 장남에 장손으로 태어난 그는 그야말로 발에 흙 묻히지 않고 유년기를 보냈다.
서울로 이사 온 그는 배재중학 시절 조용익 선생이 “그림을 잘 그리니 미술쪽으로 가라”는 조언을 들었다. 그래서 홍익대학교 전문대학 금속공예과를 졸업한 다음 중앙대학교 금속공예과 장학생으로 들어가 백태원 선생에게 배웠다.
“배재중학시절 조용익 선생에게 미술의 기초를 배웠고 이마둥 선생으로부터 순수회화의 교합된 색감과 오일물감을 서예 붓으로 표현하는 독특한 기법을, 이경성 선생으로부터 세계미술의 역사, 작가들의 작품을 비평할 수 있는 것을 배웠다”
또한 최순우, 유광열, 박서보, 신권희, 정담순, 박광진, 백태원, 권익표, 강승균, 임응식 등 그가 나열하는 스승의 이름은 끝이 없다. 학교수업보다 스승들과 같은 생활 속에서 피부로 호흡하며 배웠다는 사실을 자랑하고 싶단다.
“1973~1978년 태평양화학 제작과장으로 있으면서 광고디자인이 너무 재미있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지냈다. 소비자들의 욕구를 잘 관찰하여 기획 제작한 것이 광고효과를 충분히 보여주었다.”
신문과 TV상업광고 감독으로 상업광고계를 휩쓸던 그는 상복도 많았다. 1972 동아대전 최고상, 1972, 1975년 상공미전 특선, 1973 조선일보 광고대전 특선, 1974 국전 특선, 1974 한국일보 주최 상업광고 대전 광고대상 등등이다.
●78년 뉴욕으로
그러다 그는 1978년 9월 뉴욕으로 온다. CF감독에 만족치 않은 그는 영화를 본격적으로 배워 제대로 된 영화를 만들고 싶었던 것. 그러나 이미 홍익대 디자인과 출신 최정규씨와 결혼, 딸 둘과 함께 온 가장이라 취직부터 해야 했다.
1년반동안 뉴욕한국일보 광고국장으로 일하면서 뉴욕한인사회 광고계를 뒤흔들었다. 당시 사진 없이 활자로만 광고하던 지면을 사진을 곁들인 화려한 편집을 선보인 것이다. 신문사를 그만 두고는 무엇을 할 지 몰라 한국으로 도로 갈까 하다가 하와이 미술협회 회장인 친구를 만나러 갔다. 그 친구가 금장사를 권했다. 뉴욕으로 돌아와 맨하탄 41가에 ‘CHOI'S 주얼리’를 얻었다. 고객의 이름을 새긴 금목걸이를 직접 만들어 팔았다.
이것이 히트였다. 손님들이 몰려들어 티켓을 주어 고객들을 줄 세워야 할 정도였다.
“매일 오전 10시부터 오후6시까지 꼬박 앉아서 생업에 종사했다. 돈이 생기니 삶이 아까와졌다.”
주얼리 가게를 하면서 건물 3개, 집 4채를 지녔지만 흑인 강도가 들기 여러 번, 죽기 아니면 까무라치기로 버텼으나 안정되게 살고 싶어 모두 정리하고 뉴저지 버겐나인 애비뉴에 세탁소 있는 건물을 샀다.
“이제 리타이어 해야지.” 그러나 인생은 생각대도 되지 않았다. 술 취한 타인종이 세탁소 안으로 차를 몰고와 사고가 났고 변호사의 말대로 보험료가 나오면 고치리라 생각한 것이 오산, 몇 개월동안 세탁소가 문을 닫으니 손님이 모두 떨어져 나간 것. 다시 건물을 정리한 다음 99센트 스토어를 차렸다.
“히스패닉 동네에 차린 99스토어는 획기적인 아이디어였지만 100개 팔면 100달러, 하루 500~700달러가 고작, 매일 서있느라 발바닥이 아팠다. 가게를 정리하고 다시 32가에 주얼리 가게를 열어 금 소매업에 나섰고 2004년까지 운영했다.”
그는 생업으로 25년이상 주얼리가게를 하면서 1991~1992년 뉴저지 올드처치 아트스쿨 금속공예 강의, 2005년 프롬코리아 뉴욕공예전 기획, 2006년 뉴욕시 ‘Loot! 2006' 초대전 기획, 도미니카 한국공예전, 남북공예 UN빌딩 행사유치 등 다양한 활동을 했다.
●역사와 창조가 만나면 돈이...
최대식은 2004년 서울 산업대 금속공예과 교수로 초빙되며 한국으로 나갔다. 2006년에는 중앙대 교수로 초빙되어 12년간 후학을 양성했고 2009년 풍덩예술학교 교장, 2010년 갤러리31 대표, 2010년 서울시 조형물 심사위원, 한국미술국제교류협회 회장, 2012년 중앙대 경영대학원 문화예술학과 창립에도 기여했다.
2013년~2015년 뉴욕에서 한미유산보존회 회장으로 ‘한국 고미술품 감정. 보물을 찾아드립니다’ 행사를 진행하기도 했다. 그는 여러 행사를 기획하면서도 늘 작품에서 손을 놓은 적이 없다. 그의 작품주제는 예나 지금이나 ‘자연의 소리’다.
“회화나 조각이나 공예 등 작품에 종이, 나무, 금속재질, 금은동의 귀금속까지 모든 재질의 벽을 허물어 다양한 예술을 자유롭게 표현제작하는 것은 온 세계를 돌아다니며 시각적인 공부와 훌륭한 선생들의 큰 가르침에 있었다. 선생님들의 큰 가르침으로 세상을 나의 눈으로 볼 수 있는 한 나의 생각대로 창조적인 작업을 계속 이어나갈 것이다. ”고 말하는 그는 70이 되었지만 스승을 떠올릴 때는 어린 제자로 돌아간다.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은 생각을 움직여서 소리를 내어 각자 나름대로의 새로운 흔적들을 남기는 것이다. 이러한 삶을 집약하여 문화예술이라고 한다. 문화는 역사적인 것이요, 예술은 새로운 것을 창조(Creative) 하는 것이다. 문화예술은 꼭 아트 하는 사람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정치 경제 과학 문학 모든 분야에 표현하는 단어라고 살 수 있다. 즉 씨앗이 뿌리를 내려 열매를 만들듯이 문화의 역사적인 바탕에서 예술의 창조적인 표현이 나오는 것이다. ”
1972년 예총화랑 초대전을 시작으로 50여회 초대 개인전을 치른 그의 예술관이다.
“문화는 역사적인 것이다, 예술은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것이다. 이 히스토리와 크리에이티브와 부딪치면 중간에 돈이 생긴다.” 는 그는 2014년 12월 뉴저지 라파예트 지역에 작업 스튜디오 겸 집을 마련했다.
집 바로 옆을 흐르는 개울은 그에게 창조적 역량을 주는 열린 공간이다. 산이 있고 물이 흐르는 자연속 공간에서 그는 오전9시부터 오후 8시까지 금속, 나무, 종이를 이용하여 작품을 만든다. 이웃들은 지나가다가 들어와 작품을 사가기도 한다.
최대식은 최정규와 슬하에 아들 2, 딸 2, 손자2, 손녀1을 두었다.
“집에서 10분 거리의 뉴턴 수도원에 라루 선장의 묘가 있다. 그는 6.25전쟁시 흥남부두에서 거제도까지 피난민 1만4,000여명을 구출한 메레디스 빅토리아호 선장이었다. 레너드 라루 선장 기념관을 설립하여 세계인들에게 전쟁과 평화와 자유의 뜻을 보여주고 라루 선장의 업적을 영원히 보존하고 싶다.”
그는 라루선장 기념관에 6.25체험관, 현대미술 전시관뿐만 아니라 한옥마을 조성 계획안을 추진 중이다. 그는 70대, 80대에도 여전히 재미있게 놀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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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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