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차 한잔의 초대/ 김만길 대뉴욕지구 한국대학동문총연합회 회장
사진= 이경하 기자
유학와 아메리칸드림 성공했지만
전쟁통에 실종된 부친 찾는일 아직남아
평생을 봉제일로 뒷바라지한 아내와
댄스스포츠로 노후 건강 다져
세탁소 자영업자로, 사회봉사는 물론 다양한 취미활동으로 누구보다도 풍요로운 이민의 삶을 살고 있는 김만길 회장, 힘든 성장기를 거쳐 미국에서 꿈을 이루었지만 아버지를 그리는 그의 사부곡(思父曲)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서로 소통하는 대학총연
“1997년 인하대학교 뉴욕동문회 회장을 하면서 대학총연과 인연을 맺었다. 부회장을 거쳐 16대 김영길 회장 당시 이사장을 하다가 작년에 회장으로 취임하여 2년 임기를 시작했다. 그동안 추천받은 장학생들을 10명의 장학위원들이 심사한 다음 12월말 총회/송년의 밤을 열고 내년 1월 장학금을 전달할 예정이다. 장학금은 전직 동문회장과 일반인들의 기부, 골프대회 등을 통해 기금을 모으고 있다.”
뉴욕지구 한국대학동문총연합회(이하 대학총연) 회장 김만길은 2015년 임기를 시작하면서 “한인 2세 장학사업을 이어가겠다”는 포부를 밝혔듯 장학사업에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2014년 시작한 장학사업은 미국의 대학이나 석박사 과정 재학 중인 한인 또는 그 자녀들, 가정형편이 어려운 일반학생이 대상으로 신청자 중 30명을 선정, 각 1,000달러씩 3만달러의 장학금을 지급한다.
또한 지난 8월 개최된 ‘미팅 영 프로페셔녈 행사’는 한인 젊은이들의 열띤 호응을 받았다. 이는 원래 대학총연 주최로 상당한 인기를 끌았던 ‘젊음의 광장’이 다시 이어진 것으로 이번에는 어른이 나서지 않고 장학금 수상자인 박사과정 대학원생이 직접 앞에 나서서 올 8월 새로운 시도를 했었다.
즉 뉴저지 파인플라자 5층인 장소는 대학총연 선배들이 마련해 주고 나머지 행사는 젊은이들 스스로 직접 기획했는데 이번에 60명이 모였다. 한인 이성친구를 만나기 힘든 2세들이 스스로 친구나 배우자를 찾는 기회를 주는 행사였다. 행사 후 많은 학부모들이 대학총연으로 전화를 걸어와 ‘믿을 건 총연 뿐이다. 언제 또 행사가 있느냐?’ 는 질문이 많이 들어왔다고 한다.
김만길은 대학 총연에 대한 애정이 깊다.
“보통 30명 정도 모이는데 재능 있는 사람들이 참 많다. 대학총연 이메일 주소가 350명 정도이고 모든 대학동문회가 소통하는 것이 장점이다. 한인사회의 모범단체가 되고자 노력하고 있다”고 말한다. 대학총연은 지난 91년 건국대, 경기대, 경희대, 단국대, 부산대, 서강대, 서울대, 성균관대, 숙대, 이화여대, 중앙대 등 36개 대학이 회원 학교이며 친목 위주로 결성되었다.
● “사람들을 잘 만났다”
1945년 서울에서 출생한 김만길은 아버지의 4형제가 한 집에서 살던 대가족 속에서 성장했다. 토목공사에 다니는 아버지를 따라 어머니, 누나, 동생 둘과 함께 경북 경산에 살 때였는데 6살이던 당시 6.25가 발발했다. 경산 초등학교가 피난민수용소가 되었다.
전쟁이 진행되면서 지원병을 뽑았다. 당시 아버지의 나이 30세, 젊은 피는 나라를 구하고자 했고 대구 임시 훈련소로 떠난 아버지는 이후 영영 소식이 끊어졌다. 남은 것은 소속 부대 이름이 적힌 쪽지 한 장뿐, 이마저 전쟁통에 피난을 다니다가 아버지 생사의 유일한 단서인 쪽지는 사라지고 말았다.
이 와중에 어머니는 서울로, 시골로 남편을 찾으러 정신없이 다니고 어린 두 동생은 병들고 굶는 어려움 속에 죽고 말았다. 아버지의 형들도 모두 전쟁통에 죽고 사촌들은 고아원으로 갔다. 그러나 어머니는 소년 김만길의 손을 꼭 잡고 아무리 지독한 궁핍 속에서도 놓지 않았다. 소년은 성장했고 가정교사로 고학을 했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사람들을 잘 만났다. 가정교사 하는 집에서 등록금을 대주었다. 어린 시절 경기도 수락산 밑 덕릉에 살았는데 동네분들이 저 놈이 심부름을 잘해 하고 칭찬 해주고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중학교에 갈 때도 동네분들이 도와주었다. 올 9월 제17기 뉴욕평화통일자문회의 체육자문위원으로 평통회의차 한국에 나갔다가 60년만에 그 동네를 찾아갔다. 노인정을 지키고 있던 한 분이 ”너, 만길이 아니니?“하고 말을 걸었다. 동네사람 20명이 다 모였는데 너무 감격스러웠다. ”
●유학생에서 자영업자로
1965년 김만길은 인하공대 금속공학과 졸업 후 마산창신공고 교사로 5년, 유한공고 교사로 5년을 일했다. 1979년 연세대 공학대학원 금속공학과 석사를 받았고 한국교육개발원 연구원으로 특채가 되었다. 유한공고 교사시절 1979년 전국교사대회에서 발표한 ‘실업고교 개선’ 논문이 문교부장관상을 탄 것이다.
1982년 미국 유학을 온 김만길은 피츠버그대 산업교육대학원을 1년간 마치고 1983년부터 방위산업체인 맨하탄 캐논 알루미늄 회사 엔지니어로 일하며 뉴욕과 인연을 맺었다.
“미국에 와보니 교육시스템이 너무 좋았다. ”는 그는 수년간 미국 직장을 다닌 후 87년 롱아일랜드 아이슬립에서 세탁업을 시작했다. 아내 김숙희는 이민초기 봉제공장에서 보통 주급 200달러일 때 800달러를 받을 정도로 손이 빠르고 정확했고 기계가 고장나면 금속공학을 전공한 그가 고쳤다.
“세탁소를 한 지 몇 년 후 재개발 지역이 되며 다들 떠나갔다. 지역상공회의소, 라이온스, 로타리클럽, 오라는 곳에는 모두 나가서 말했다. 다들 비즈니스를 접고 떠나는데 나는 여기서 성공하고 싶다고 외쳤다. 내가 가진 것이라고는 1에이커 땅 뿐이라고 하자 지역정치인들은 거기에 빌딩을 지으라고 조언했고 변호사를 소개해 정부보상, 펀딩, 세제혜택에 대해서 알려주었다. 현재 1층 5,500스퀘어 피트 면적에 세탁소와 100대의 세탁기가 돌아가고 있다.”
세탁소만 남았던 동네는 수많은 빌딩이 들어서고 도로가 넓어지면서 현재 2,500세대가 살고 연방빌딩과 대학교가 들어섰다. 김만길은 98년 마리오 쿠오모 뉴욕 주지사로부터 세탁소 스페셜 인증을 받았을 정도다.
●아내와 함께 춤을
김만길은 현재 대학총연 회장, 평통자문위원, 대한씨름협회 미주지부 상임고문으로 봉사하며 댄스 동호회도 참여한다. 웨딩가운 바느질을 68세인 지금도 할 정도로 봉제일을 평생 해온 아내는 과로로 몸이 약해지니 뭔가 운동을 해야 했다.
“94년도에 댄스스포츠를 시작할 때는 쑥스럽고 창피했으나 지금은 모임에 나가면 스타다. 아내도 건강해졌다. 여가 선용과 건강을 위해 시작한 댄스가 소중한 취미가 되었다”
김만길 김숙희 부부는 전국 각 주에서 열리는 댄스스포츠 대회에 참여하며 상도 여럿 탔다. 제2대 뉴욕댄스스포츠협회 회장, 백혈병 어린이돕기 댄스페스티벌 후원회장도 했다.
2007년에는 제14대 뉴욕대한체육회 회장을 하면서 샌프란시스코 전미주 체전에 300여명의 최대 선수단, 임원진을 이끌고 다녀왔다. 김만길은 “가만히 있지 못하고 뭐든 배워야만 직성이 풀린다. ”고 자신의 성격을 말한다. 그는 한국산악회 산악학교 1회 졸업생으로 산타는 것도 좋아한다. 매달 두 번째와 네 번째 토요일에 고대 고용화 전회장을 중심으로 20~30명의 대학총연 회원들이 모여 세븐레이크 등 단거리 산으로 등반을 한다. 김만길은 김숙희와 슬하에 2녀1남, 손주 2명을 두었다.
●끝나지 않은 사부곡
김만길은 6.25전쟁시 실종된 아버지의 흔적을 지금도 찾아다닌다. 육군본부, 청와대에 진정서를 내고 국방부 산하 유해발굴감식단에 DNA 등록도 해놓았다. 6.25발발 50주년인 지난 2000년 발족된 유해발굴감식단은 생존자의 증언과 전쟁터를 찾아 전사자를 발굴하고 있지만 전쟁통에 기록이 제대로 남아있는 것이 없다보니 아버지의 자취를 찾는 것은 쉽지 않다.
그는 27년만에 한국을 방문하여 경산에서 1주일동안 머물면서 병적계에서 당시 자원입대한 징집서를 열람했고 살아 돌아온 20명의 군번을 모두 찾아내어 아버지에 대해 물어보기도 했다.
그가 기억하는 것은 1917년생 아버지 성함 김인재, 1920년생 어머니 정복희뿐이다. 어머니는 미국에서 94세로 돌아가실 때까지 모셨고 한국에 사는 유일한 누나도 유전자 등록을 해놓았다. 71세 할아버지인 지금도 아버지를 떠올리면 언제나 아버지와 즐겁게 놀았던 6세 소년으로 돌아간다는 김만길, 아직도 끝나지 않은 그의 절절한 사부곡(思父曲)) 언제쯤 해피 엔드를 맞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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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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