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병이 드러나기 전에는 보통 반복적으로 전조가 나타나기 마련이다. 이것을 무시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가는 큰일을 당하게 된다. 또 모든 재난에는 무수한 사전 징후가 있는 법이다. 1930년대 한 미국 보험회사에서 일하던 공학전문가 H.W. 하인리히는 큰 참사가 일어나기 전에는 통상적으로 300번의 아주 경미한 사고들과 29번의 작은 재해가 일어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런 징후들을 사소한 것으로 여기다 큰 참사를 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에 정치적 참사를 초래한 박근혜 대통령이 정치인으로서 ‘불량품’이라는 징후는 그의 정치생활 기간 내내 무수하게 나타났다. 하지만 이런 징후들이 수많은 국민들과 언론, 그리고 그의 영향력이 필요했던 기회주의적 정치인들에 의해 간과되거나 무시되면서 결국 어처구니없는 사단이 빚어졌다.
‘정치인 박근혜’의 언어에서는 정제된 비전이나 철학을 전혀 엿볼 수 없었다. 빈곤한 인문적 소양과는 별개로 말이다. 논리를 찾아보기 힘든 비문으로 점철된 그의 언사는 정돈되지 않은 의식세계를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었다. 박근혜가 한나라당 대표이던 시절 같은 당에 몸담았던 김덕룡 전 의원은 “당시 최고위원 회의를 할 때 대표가 전혀 회의를 주재하지 않아 이상하게 생각했다”며 나중에서야 그 이유를 알게 됐다고 말했다.
빈약한 논리뿐 아니라 어휘를 정확히 사용하지 못하는 실수 또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박근혜 자신만은 스스로의 약점을 잘 인식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수첩이나 원고에 의지하지 않는 발언은 극력 회피했다. 이것을 측근들과 언론은 ‘과묵’과 ‘원칙주의자’로 포장해 팔았다.
2012년 대선후보 토론회는 정치인 박근혜의 이런 수준을 알아챌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지만 유권자들은 이를 지나쳤다. 겉만 크고 그럴듯할 뿐 내용물은 형편없는 ‘뻥 포장 과자’ 같은 박근혜를 단지 잘 팔린다는 이유로 정치판에 끌어들여 이용해 온 세력들은 불량품을 팔아온 부도덕한 업자들과 다를 바 없다.
하지만 박근혜가 갖고 있는 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수준 이하의 언어가 아니다. 대통령 자리까지 올랐지만 민주주의가 무엇인지에 대한 아주 기초적인 이해조차 없다는 점이다. 박 대통령은 역대 어느 대통령들보다도 더 자주 ‘민주주의’를 들먹이며 반대세력을 공격했지만 정작 그 자신은 이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국민들이 공익과 국익을 위해 잘 사용해 달라고 위임한 권력을 ‘자기에 의한 자기를 위한 자기의 권력’으로 착각한 것이다.
박 대통령은 ‘아버지의 성’에 갇힌 채 그 시절에서 단 한 발짝도 나가지 못했다. 아니, 아버지 시절의 나쁜 것들만 답습했다. 그러니 박근혜의 3년 반 동안 공적 시스템이 붕괴되고 대통령의 사적 욕망을 위해 측근들이 충성 경쟁을 벌이는 전근대적인 국가로 퇴행한 것은 하나도 이상할 게 없다.
헌법은 대한민국을 ‘민주공화국’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공화국은 ‘공화주의’에 기초한 국가를 말한다. 라틴어인 ‘레스 푸블리카’(res publica)에서 나온 ‘공화주의’는 공공이익과 공동선을 우선적으로 추구하고, 공적인 것을 사적인 것보다 우위에 놓는다.
정치인들과 공직자들이 이런 정신을 갖고 있는 나라만이 진정한 공화국이다. 권력을 사유화한 대통령과, 대통령의 사익을 위해 본분을 망각한 채 충성 경쟁을 벌여온 공직자들은 민주공화국의 구성원으로서 함량 미달이다. 그러니 대통령은 청와대에 앉아 있을 자격이 없다.
이런 대통령은 지도자라 부르기조차 민망하다. 그저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조직의 보스 정도로 보는 게 더 적절하다. 그나마 박 대통령은 신망 있는 보스조차 되지 못한 것 같다. 국정농단 게이트 수사가 속도를 내면서 측근들의 배신도 본격화되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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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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