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사는 이야기/ 뉴욕태권의 대부 박연환 사범
9살때 시작...뉴욕 오자마자 시작한 도장 36년째 운영
뉴욕서 태권도 붐.올림픽 종목 채택에도 큰 기여
두 아들 모두 아버지 뒤이어 태권도 현지화에 한몫
평생을 태권도와 함께 사는 이가 있다. 1980년대는 뉴욕의 태권도 붐을 일으키는 선봉장 역할을 했다. 태권도의 올림픽 정식종목 채택을 이끌어 낸 일등공신이기도 하다. 그는 뉴욕태권의 대부이자 YH PARK 태권도 아카데미 박연환(64) 회장이다.
■ 장성을 꿈꾸던 태권소년
그는 1952년 전북 정읍에서 농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학창시절은 고향에서 보냈다. 초등학교 땐 축구선수. 포지션은 라이트 윙. 지역대회 우승에 한 몫 하는 실력이었다. 태권도는 9세 때 시작했다. 열 살 차이의 형 덕분(?)이다. 감나무를 향한 형의 화려한 뒷발치기에 반해 배우게 됐다. 한 주먹(?)하던 고교 재학시절엔 체육부장. 전국 고등부선수권대회서 챔피언에 등극, 태권도 샛별로 떠올랐다. 성격은 밝고 활달했다. 노래솜씨가 뛰어나 당시 금지곡 ‘유정 천리’를 선배들에게 가르칠 정도였다. 장래의 꿈은 장군. 남들을 호령하는 리더십에 매력을 느껴서다.
대학은 태권도 우수선수로 고려대학교에 진학했다. 전공은 ‘사학과’. ‘역사를 알아야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는 개인 철학 때문. 태권도 선수로 전국 신인선수권대회를 석권했다. 1975년 대학연맹 단체전 우승으로 고려대를 태권도 명문교로 명성을 떨치게 했다. 대학 2학년 후 해병대 태권도 선수로 입대. 복무기간에도 해병명예를 위해 각종대회 우승의 선봉장 역할을 했다.
군대와 대학을 마친 그는 1978년 정부선발 해외 파견 태권도 교관으로 남아프리카의 레소토에 갔다. 그곳에서 군인들에게 태권도를 가르쳤다. 시간을 쪼개 지역주민도 지도했다. 태권도 국가대표 선수 트레이닝도 했다. 당시 지역주민들은 그를 ‘브루스 박’이라 불렸다. 그렇게 2년의 세월이 지난 뒤. 뉴욕으로 오게 됐다. 그 때가 1980년.
■ 뉴욕 태권도 붐의 선봉장
그는 1980년 뉴욕에 왔다. 오자마자 롱아일랜드에서 태권도 보급에 힘쓰던 형(박연희)이 운영하던 태권도장을 물려받았다. 지금까지 36년 동안 뉴욕 태권도의 오늘을 일구는데 헌신했다. 9세 때 태권도를 배워 평생을 태권도와 함께 살고 있는 셈이다.
태권 종주국 한국의 챔피언 출신인 그의 등장은 뉴욕 태권도 붐에 견인차가 됐다. 화려한 태권도 실력이 소문이 나면서 앞 다퉈 제자가 되겠다며 줄을 섰기 때문이다. 당시 뉴요커들은 이소룡 영화로 동양무예에 신비감을 갖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태권사범의 실력을 테스트하려는 이들이 많았다. 그 때문에 화려한 발차기는 기본. 엄청난 두께의 송판 격파 시범도 보여야 했다. 덩치가 산만한 미국인 장사들과의 한판 대결도 불사했다.
그렇게 태권도의 실체를 입증하자 문하생이 몰려들었다. 관원들이 늘면서 도장도 하나씩 더 열었다. 500-800명의 대규모 도장을 9개까지 열었다. 그러면서 한국 태권도 사범들에게 취업의 문도 열어 주었다. 1986년 무렵부터 경희대, 용인대 태권도학과와 전북태권도협회에 각각 2명씩을 요청하는 등 현재까지 20명 넘게 초청했다.
공인 9단인 그는 1980년부터 도장을 운영하고 있다. 그동안 양성한 블랙벨트는 1,000명이 넘는다. 문하생 숫자는 6,000명도 더 된다. 그를 스승으로 깍듯이 모시는 정치인, 경찰간부, 판사, 은행장 등 주류 인사들도 수두룩하다. 지금까지도 YH PARK 태권도 아카데미가 뉴욕 태권도의 트레이드마크로 통하는 이유다.
■ 태권도 올림픽 채택 일등공신
그는 미국 올림픽 태권도국가대표 코치로 1988년 서울올림픽에 참가했다. 1996년 애틀랜타와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도 임원으로 참가했다. 그렇게 국제적인 교류에 힘을 쏟았다. 무엇보다 태권도가 올림픽 정식종목으로 채택되는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 태권도가 올림픽 정식종목으로 결정된 것은 1994년 파리에서 열린 IOC 총회다. 그 직전에 큰 영향을 미친 이벤트가 뉴욕에서 있었다.
‘메디슨스퀘어가든’에서 열린 93태권도 세계선수권대회였다. 세계의 중심인 뉴욕의 맨하탄 ‘메디슨스퀘어가든’에서 세계대회가 열린 것은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ABC 방송은 대회를 방영했고, 시청률도 상상을 초월했다. 그 대회의 중심에 있었던 주인공이 바로 ‘박연희, 박연환’ 형제였다. 이들 형제는 태권도 정식종목 채택에 부정적인 일부 위원들에게 태권도의 본모습을 제대로 보여주고 설득하기 위한 취지로 이 대회를 개최했다.
대회경비도 대부분은 이들 형제가 충당했다. 대회 성과는 성공적이었다. 미국에서 태권도 열기와 붐이 일어났다. 일부위원들의 반대 목소리를 잠재우는 결정타가 됐다. 뉴욕서 열린 93태권도 세계선수권대회가 94년 총회 때 태권도의 정식종목 채택 결정에 큰 기여를 한 것이다. 그리고 그 주역이 바로 ‘박연희, 박연환’ 형제였던 셈이다.
■ 우리는 태권도 가족
박 회장의 3남매는 태권도 고단자다. 수려한 기량과 완벽한 언어 실력도 겸비했다. 한인사회와 주류사회의 연결고리 역할을 하고 있다. 큰 딸 ‘니나’는 K팝 가수다. 2003년 머라이어 캐리의 내한 공연 때 오프닝 무대를 장식했다. 2004년 싱글앨범 ‘Hit'm'으로 데뷔했다. 매력적인 외모와 폭발적인 가창력을 뽐낸다. 파워풀한 댄스가 일품이다. 태권도 공인 3단.
장남인 ‘에디(30)’는 아버지와 함께 사범으로서 도장을 운영하고 있다. 척박한 미국 땅에 태권도의 씨앗을 심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태권도의 현지화라는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는 스포츠 엘리트다. 고교시절엔 야구, 농구와 미식축구 등 3개 종목 주장으로 활약한 스포츠 신동이다. 마운트세인트빈센트 대학에서는 야구선수였다. 2009년 졸업 후 2세 태권도 사범으로 인생을 개척하기로 결정했다. 그때부터 태권도장을 직접 운영하며 수련생을 지도하고 있다. 더불어 이제는 2006년 아버지가 태권도 대회와 한국의 문화와 음식을 소개하는 종합축제로 창설한 ‘뉴욕오픈태권도’의 총 책임도 그의 몫이다. 태권도 공인 5단.
막내인 ‘엘리엇(22)’은 대학에서 ‘비즈니스’ 공부를 한다. 졸업 후에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형과 함께 태권도장에 합류할 예정이다. 수련생을 지도하고, 태권도 프랜차이즈 모델 보급을 계획하고 있다. 태권도 공인 4단.
박 회장은 “자녀들이 태권도를 배워 큰 어려움 없이 착하게 사춘기를 보낸 것에 감사한다. 두 아들이 태권도 아카데미에 합류한 것 역시 큰 보람으로 여긴다. 태권도의 소양은 물론 언어와 문화에 대한 이해가 완벽한 2세들이 중심추가 될 때 미국 태권도의 발전에 견인차 노릇을 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귀띔한다.
■ 영원한 태권도인
그는 약 40년 태권도 도장을 운영하며 한국의 국위선양과 태권도의 우수성 보급을 사명으로 여기도 있다. 태권도의 장점으로는 수줍은 아이들도 자신감과 담력이 넘치는 활발한 모습으로 변하는 것을 꼽는다. 또 말썽꾸러기들도 모범생이 된다고 한다. 태권도는 무술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부모와 어른에 대한 효도와 공경심을 배양하고 명상을 통해 마음을 수양하기 때문이란다. ‘태권도는 인간완성을 만드는 무도이며, 성숙하게 만드는 무도’라는 그는 “태권도 지도자들은 무도인으로서, 태권도인으로 먼저 의리와 예의를 갖춰야 한다. 무도인은 의리를 지킬 줄 아는 사람이며, 그 것을 실천하면 그가 곧 도인”이라며 태권도 지도자가 갖춰야 할 덕목을 귀띔한다.
욕심을 부리지 않고 자기 그릇에 맞게 사는 것을 올바른 삶으로 삼고 있는 그는 남은 인생도 지금처럼 남을 따뜻하게 여기고 배려하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려고 한다.
그는 1997-1999년까지 롱아일랜드 한인회 제3대 회장을 맡았었다. 임기 중에는 태권도 보급을 통해 한국의 이미지를 알리고 국위를 선양하는 사업을 했다. 당시 롱아일랜드대학에 교수로 임명 태권도학 강의를 시작, 현재까지 하고 있다.
태권도 학생들을 동원 한미문화축제와, 크리스마스 파티 등 공연에서 각광도 받았다.
주류사회에 한국을 알리는데 크게 공헌한 업적을 남겼다. 2002년부터 뉴욕한인태권도협회 회장에 당선되어 그 후 6년 동안 회장직을 수행했다. 2009년부터는 미국에서 태권도장을 운영하고 있는 관장, 사범이 주축이 된 미국태권도지도자연맹의 회장을 맡기도 했다.
언제, 어디에 살든지 태권도가 세계에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최선은 다하는 삶을 살고자 한다는 그는 “다시 태어나도 지금, 현재의 정신 몸가짐 마음가짐으로 태어나고 싶다. 태권도는 나의 인생이자 나의 삶”이라며 영원한 태권도인의 자부심을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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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창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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