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산홍엽 물들어 가는 가을이 하루가 다르게 짙어 간다. 이때쯤에는 누구라도 시인이 되고, 바람처럼 여행을 떠나 보고픈 감성이 살아나는 계절이기도 하다. 목화 솜 같은 구름이 하늘을 덮은 날에 들꽃에 앉은 갈바람을 몰고 아들부부가 집에 다니러 왔다. 나의 생일과 아들의 결혼기념일이 같은 날이다 보니 서로 축하를 해 주기 위해서 포근한 자리를 마련했다.
며느리의 알뜰한 손길로 직접 만들어 들고 온 장미가 올라간 떡 케이크와 미역국, 하트모양으로 정성을 들인 먹기도 아까운 전과, 내가 준비한 몇 가지 음식을 올려놓으니 식탁이 금 새 꽃동산이 되었다. 들녘에 여문 참깨가 터지듯이 즐거운 대화가 이어 지다가, 깊어 가는 밤을 밀어 내며 아들의 어린 시절로 되돌아갔다.
한글을 다 이해 하지 못할 나이에 이민을 오게 된 아들을 위해 동화책과 위인전집 등을 있는 데로 다 꾸러미에 넣어 왔다. 혹시라도 내나라 말과 글을 영영 잃어 버릴까봐 은근히 걱정이 되었고, 그것이 부모의 도리라는 책임의식도 있었던 것 같다. 처음에는 친구도 없고 영어를 할 줄 모르니 열심히 한국 책만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학교를 입학하기 위해서 영어가 급했지만 어린 나이라 영어는 금방 따라 간다고 어른이나 걱정하라고 주변에서 훈수를 하기에 염려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걸음마 영어를 배우면서 점차 말문이 트이고, 일 년이 지나자 영어로 잠꼬대를 하고는 한국어 책을 놓아 버렸다. 영어가 유창해 질수록 한국말의 억양이 달라지고 가끔은 기상천외한 한국어를 개발하여 요즘 말로 우리를 웃프게 만들었다. 천장에서 돌아가는 선풍기를 “풍선기”라고 하는가 하면, 소나기가 무섭게 쏟아지던 어느 날에는 “쥐구멍에도 벼락 칠 날이 있다”라고 하면서 예전에 읽었던 책을 들먹일 때는 어이없는 헛웃음만이 위로가 되어 주었다. 지금도 가끔 국적이 불분명한 말을 해서 그 때마다 며느리가 놀려 준다고 약을 올리니 “어서 식사 잡수세요” 하며 농을 던진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났었다. 이곳에서 태어난 막내딸이 따라 나왔다. 얼굴도 예쁘게 생겼지만 날씬한 허리에 내 눈이 꽂혔다. 풋풋한 젊음보다 잘록한 허리사이즈가 궁금해졌다.
쥬리야 허리가 몇 이이야? “ㅎ ㅎ 허리는 한 개 지요” 망설임 없이 대답하고 딴청을 부리는 엉뚱한 모습에 우리는 번갈아 한쪽 눈을 찡긋하고 넘겨버렸다. 정답이 아니지만 완전히 틀린 답도 아닌듯한 아리송한 대화가 이민자 가정 자녀들에게서 자주 목격하는 애교스러운 일상이다.
그런데 이런 비슷한 해프닝이 한국에서도 점점 늘어 간다고 한다. 서로 소통의 부재라고 하면서 자기 말만 들이대고, 가정과 사회가 알아듣지 못 하는 말로 단절이 되어 간다는 씁쓸한 소식이 억새를 흔드는 가을바람만큼 서늘하게 다가온다. 요즘에는 빠르게 문화가 언어에도 침투해서, 긴 문장도 줄여서 한 단어로 만들고, 희한한 은유어가 멋지게 포장되어 날아다닌다.
가끔은 일간 신문에서도 이해 불가능한 표현을 아무렇지 않게 찍어 내 놓는다. 다중언어를 상대하는 우리 자녀들이 올바른 한글을 이해하지 못 하면 한국인의 정체성도 혼란스럽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상대방과 소통하기 위해서는 바른 말을 조리 있게 잘 전달해야 하고, 마음을 사고 감동을 시키는 진실한 대화도 말을 잘 다듬을 줄 아는 적절한 표현을 구사할 줄 알아야 한다.
바야흐로 천고마비의 계절이다. 좋은 책을 많이 읽고 자녀들에게도 한국책을 선물하여 마음이 통하는 대화를 할 수 있게 한국말을 잘 하는 어른들이 해야 할 숙제라 생각한다. 그래도 읽고 쓰고 일상적인 대화가 가능한 아들이어서 다행스럽고 감사한 일이다. 보이는 것들로 풍성한 가을에는 마음을 비우고 가슴에 넉넉함을 채우는 계절이 되길 소망한다. 엄마와 아내 덕분에 오늘밤 과식을 했다고 엄살을 부리며 자리를 뜨는 아들이 끝까지 웃음을 선물한다. “푸대접 받고 갑니다. ㅋ ㅋ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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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명선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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