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을 향해 열어 둔 창 너머로 새 소리가 들려 왔다. 반쯤 내려진 블라인드 사이로 겨우 사위 (四圍)를 분간할 만한 빛이 새어 들어오고, 그 어렴풋한 빛으로 벽에 걸린 시간을 확인한다.
밤 사이 더 짙어진 숲의 나뭇가지 위로 새들이 바쁘게 옮겨 앉으며 서둘러 하루를 시작하라고 보채지만, 나를 둘러싼 빛이 조금 더 밝아 질 때까지 기다려 보기로 한다. 한 해의 괘도를 숨차게 달려와 드디어 반환점을 돌았으니 이제 다시 새로운 기분으로 신발 끈을 고쳐 매며 숨을 고른다.
숲 풀 사이에 수줍게 핀 하얀 개망초 무리도 반갑고, 산책길의 깨진 보도블럭 틈에 뿌리를 내린 이름 모를 생명에도 안부를 묻고 싶은 평화로운 날이다. 거실에서 혼자 떠들던 TV에는 머리가 희끗해진 낯익은 노교수가 나와 아버지를 추억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시인(詩人)이어서 가난을 그대로 받아 들였고, 그 가난을 부끄럽지 않게 여기시던 아버지를 따라 자신도 주저 없이 문학을 평생의 업(業)으로 알며 살아 왔다는 박동규 교수의 눈에는 아버지 목월(木月)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이 눈물로 맺혀 있었다.
매년 적자를 내면서도 아버지가 만든 월간 시 잡지 ‘심상(心象)’을 40년 가까이 발행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을 문학의 길로 인도해 준 아버지에 대한 부채를 갚는 당연한 일이었다고 했다. 아버지에 대한 존경과 사랑의 또 다른 표현이라 짐작하며 TV를 보는 내내 덩달아 마음이 뭉클해 졌다. 한때 ‘유명시인의 아들’ 이라는 꼬리표가 싫어 원망서린 불평을 털어 놓을 때마다 ‘ 아버지를 닮아 보고, 뛰어 넘어 보라’고 타일렀다던 박 교수의 어머니에 대한 회상도 인상적이었다.
비록 아버지의 분야인 시(詩)대신 소설을 전공으로 택해 ‘소설이론의 전문가’가 되었지만 문학의 길로 인도해 준 아버지에 대한 존경과 그가 택한 길에 대한 확고한 신념은 정말 부러웠다. 언젠가 어떤 인터뷰에서 한 젊은이가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즐기기 위해 오히려 가수라는 직업을 택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을 보았다.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지 않고 분리함으로써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평생 즐기며 살겠다는 그 순수성은 역시 젊은이들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인 듯 싶어 부럽기조차 했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아 평생을 즐겁게 일하며 보람을 찾는 삶, 또 직업과는 별개로 좋아하는 일을 즐길 수 있는 여유가 있는 삶, 이 모두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면 축복된 삶이라 여겨졌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인생은 생각보다 짧고, 많은 것을 가질 수 있다고 믿었던 젊음의 시간은 더 짧았다. 지나고 나니 손에 잡힌 것은 보잘 것 없는 몇 날의 영광과 또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절망뿐이었다. 지금보다 더 남루하더라도 하고 싶은 일을 했었더라면 하는 부질없는 회한도 빛이 바랬다.
대학을 졸업한 젊은이들이 학교 밖 사회로 쏟아져 나와 무더운 여름을 보내고 있다. 오랜 불황으로 학교 담장 너머의 사회가 생각만큼 호락호락 하지 않은 시절이니 한여름 폭염이 더 뜨겁게 느껴질지 모르겠다. 이미 꿈꾸던 일을 찾아 자리를 마련한 젊은이들은 처음 마주한 일 앞에서 적응의 시간을 보내느라, 그 기회조차 찾지 못한 젊은이들은 좌절을 느끼고 스스로를 자책하며 가장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라는 거대한 용광로에 쏟아져 나온 그들의 뒷모습이 푸른 숲의 끝에 걸린 여름처럼 싱그럽다.
평생 열정을 바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선택하는 가장 숭고한 시간, 그 아름다운 꿈을 꾸는 젊은이들의 뒷모습에서 희망을 본다. 그리고 그들의 선택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한 여름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다 느닷없는 폭풍을 만날 지라도 찬란한 여름을 위한 초록빛 연가를 부르라!!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