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시린 겨울이라도 봄이 오지 않은 적 없고 그 어느 봄도 꽃을 피우지 않은 적 없다고 문필가는 이 봄을 노래한다. 긴 겨울 만큼이나, 깊었던 얼음만큼이나 봄은 더 아름답고 소중하게 우리 곁에 다가와 사방을 치장해 준다.
보라빛 결 고운 샤프란이 맨땅에서 솟아나올 때면 상쾌한 바람 가지에는 부산한 흔들림이 새 생명을 재촉한다. 같은 시간 속에서도 꽃이 피고 지는 순서가 다르듯이 한 시대에 머물러 있어도 세상의 곳곳에서는 각기 다른 살아가는 모습으로 존재를 드러낸다. 돌고 도는 자연의 이치에서 사람들은 지혜를 터득하게 되고, 다시 찾아오는 계절은 빠르게 지나간 삶의 모습을 뒤돌아보게 하는 쉼표가 된다.
4월이 되면 그 많은 이름 중에 미자 언니가 떠오른다. 회사에 먼저 입사한 선배이기도 하지만 나보다 두 살 많기도 하고 살갑게 대해 주다 보니 자연스럽게 언니라고 부르게 되었다. 아담한 체구이지만 목소리는 성우같이 예쁘고 청량했다. 성악을 하고 싶어서 지방에서 서울로 입성했지만 현실은 꿈과 점점 멀어져 가다가 직장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하지만 가슴속에 소중히 품고 있는 노래에 대한 욕망은 식어지지 않았기에 틈만 나면 목청을 가다듬고 노래를 흥얼거렸다.
하루는 점심을 급하게 마치고 식당을 빠져나오며 내 손을 끌고 회사 옥상으로 튀어 올라갔다. 두 손을 가지런히 배꼽아래 포개고 심호흡을 하더니 잘 들어 보고 어떤지 말해줘 알았지 하고는 “목련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질 읽노라 (중략) 돌아온 사월은 생명의 등불을 밝혀 든다. 빛나는 꿈의 계절아 눈물 어린 무지개 계절아. 관중이 나 혼자이게 너무 아쉬워 사방을 둘러보니 정원에서 하얀 목련이 꽃으로 화답하고 있었다.
꾀꼬리 같은 이 목소리를 숨겨 두고 다른 일을 하고 있는 언니를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해졌다 .언젠가는 빛나는 꿈의 계절이 언니의 계절이 되기를 진정으로 원하며 몇 번이고 같은 노래를 들었다. 점심시간이 끝나는 것이 아쉬워 한번 이라도 더 부르고 싶어 안달을 하다가 옥상에서 내려와 감상평으로 자판기 커피를 나눠 마시는 봄날을 이어갔다.
나는 목련을 특별히 좋아했다. 내가 일하는 사무실 책상 앞에도 하얀 목련이 유리창에 박혀 숨 쉬고 있었다. 면사포 드리운 수줍은 신부 같기도 하고 갓 태어난 아가의 숨결 같기도 하다. 겨우내 품고 있던 온기를 젖빛 같은 하얀 꽃으로 긴 기다림의 심정을 만방에 선포하듯이 우아하게 터트리는 하얀 속살을 훔쳐보며 옷매무새를 가다듬곤 했다.
목련꽃이 피는 봄은 희망의 대명사 이고 꿈의 계절임에 틀림이 없다 .그래서 봄은 설렘으로 다가오고 떠나 갈 땐 아쉬움도 크다. 활짝 피었다가도 어느 순간 훌훌 털어 벗는 목련처럼 봄은 4월이란 계절을 물어다 놓고 슬그머니 화려한 자리를 떠난다.
미자 언니와 옥상을 오르내리며 불렀던 노래는 봄만 되면 여지없이 피어나는 사랑스런 목련이기도 하지만, 꿈같이 흘러가 버린 젊음의 한 페이지로 누렇게 퇴색되어 가는 내 삶의 뒤안길 같기도 하다. 세상의 한 귀퉁이에서 꽃으로 피어나서 봄날처럼 살고 싶었던 욕망도 한 겹씩 벗겨 내고 보니 순리대로 돌아가는 자연의 이치가 진리인 것을 깨닫는다.
조금만 더 견뎌 보자. 조금만 더 참아 보자. 조금만 믿고 기다려 보자. 세월을 약처럼 삼키면서 커다란 꿈은 점점 사그라지고 단단한 꽃씨 하나만 영글어 가고 있다. 우리의 삶이 늘 봄바람 이라면 더 할 나위 없이 행복 하겠지만 그렇지 못 하기 때문에 마음만 이라도 봄처럼 살기를 소망한다. 비록 짧은 봄 일지라도 그 때를 기억하며 긴 겨울을 이겨 낸다.
세상의 모든 곳에 어려움이 널려 있어도 봄이 찾아오듯이 오늘도 목련꽃 그늘아래서 4월의 노래를 불러 본다. 베르테르의 슬픈 사랑의 편지가 아름다운 시로 노래가 되었듯이.
<
고명선 <수필가>>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