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비무장지대 목함지뢰 도발과 서부전선 포격으로 조성된 한반도 긴장상황이 남북 고위급 간 마라톤협상이 극적으로 타결되면서 일단은 봉합됐다. 양측은 43시간에 걸친 회담 끝에 지뢰폭발 유감 표명, 확성기 중단, 대화와 교류 활성화 등을 골자로 한 합의문을 발표했다.
이번 사태에 따른 남북의 이해득실을 정확히 따지기는 아직 이르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어느 누구도 패자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양측 모두 지난 3주일간의 충돌로 정치적으로는 얻을 만큼 충분히 얻었다. 북한은 전시동원령과 선전선동을 통해 흔들리던 체제를 결속시킬 수 있었다. 한국에서도 긴장상황은 골치 아픈 현안들을 블랙홀처럼 삼켜버렸다. 또 협상이 타결되면서 대통령 지지율도 오름세를 보이고 있다. 의도하지는 않았더라도 남과 북은 이번 사태로 서로에게 도움을 안겨준 셈이다.
‘적의 적은 친구’라는 말이 있지만 ‘적이 곧 친구 같은 존재’인 경우도 있다. 개인관계보다는 국제관계에서 주로 그렇다. 적대적 상황에 놓인 상대들끼리 서로 돕는 이런 관계를 ‘적대적 공생’이라 부른다. 2차 대전 후 냉전시대에 정치학자들이 개념화한 표현이다.
당시 미국과 소련은 극단적인 대립상황에 놓여 있었다. 미국과 소련의 강경파들은 서로에 대해 극단적인 증오를 드러내기를 서슴지 않았다. 그러면서 치열한 군비경쟁을 벌였다. 이런 상황은 양 진영 극단주의자들의 입지를 강화시켜 주는 결과를 가져왔다.
적대적 공생을 언급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남북관계이다. 분단 이후 남과 북은 유혈상쟁을 불사하지 않는 극도의 적대적 관계를 지속해 오고 있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런 관계는 양측의 집권세력에게 입지를 다지고 이익을 추구하는 데 도움이 되는 환경을 제공해 왔다.
박정희 정권이 1972년 유신을 선포하기 직전 두 차례에 걸쳐 북한에 이를 예고했음을 보여주는 동유럽 외교문서들이 몇 년 전 공개됐다. 유신 2개월 뒤 북한 독재자 김일성은 ‘수령 절대주의 체제’를 강화하는 조치를 내렸다. 박정희와 김일성이 겉으로는 으르렁댔지만 실제로는 서로를 이용해 자신의 권력을 강화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적대적 공생은 분단 이후 대부분 시기의 남북관계를 지배해 왔다. 패턴을 보면 주로 북한이 먼저 도발하고 남한이 대응하는 식이었다. 북한은 매년 한미 합동군사훈련 시기만 되면 경기를 일으키듯 온갖 비난을 쏟아낸다. 하지만 속으로는 이런 훈련이 더할 수 없이 고마울 것이다. 체제 결속과 주민 세뇌에 이보다 좋은 호재는 없기 때문이다.
한국의 극우세력에게도 북한의 도발은 고맙기 짝이 없을 것이다. 불리한 이슈들을 덮고 반대 세력을 궁지로 모는데 더할 수 없이 유용하니 말이다. 오죽하면 “위기가 없는 것이 가장 큰 위기상황”이라는 말까지 나오겠는가. 남북 긴장상황이 시작된 후 일부 언론들이 보인 보도행태는 우려스러울 정도였다.
미국의 정치학자 헨리 브룩스 애덤스는 “현실정치는 무엇을 가장하든, 언제나 체계적인 증오를 조직화 하는데 달려 있다”고 지적했다. 정치의 원동력은 증오라는 것이다. 목적과 수단이 같다 보니 극과 극은 서로 통한다. 그렇게 보면 적대적 공생은 어느 정도 자연스러운 인간사회 현상이다.
문제는 이것이 악용될 때 치러야 할 대가가 너무 크다는 점이다. 적대적 공생이 너무 오래 지속되다 보면 온건하고 합리적인 목소리는 묻혀 버린다. 그리고 천문학적 국방비 지출과 국민들의 심리적 불안 등 적대 분위기에 따른 비용 또한 엄청나다.
남북이 마라톤협상을 통해 모처럼 전향적 내용의 합의를 도출하면서 관계개선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지고 있다. 이런 기대감이 현실이 되려면 무엇보다도 집권세력이 남북관계를 정략적으로만 바라보려는 나쁜 습성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아무쪼록 박근혜 대통령이 역사인식과 인내심을 갖고 남북간 ‘우호적 공생’의 새로운 전기를 만들어가게 되기 바란다. 향후 남북관계는 박근혜 대통령에게 커다란 도전이자 기회가 될 것이다.
yoonscho@koreatimes.com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