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영일 ‘첼로 연주자’
뉴욕의 여름에 대한 나의 유일한 기억은
화재비상계단이다.
태양이 빌딩의 반대쪽으로 지는 저녁이면
사람들은 화재비상계단으로 이동했었다
좀 서늘한 그곳에서
더러는 몸을 쭉 펴고는 잠을 자고
더러는 그저 조용히 앉아있던 곳
창문턱엔 수많은 제라늄들 꽃병들
혹은 화분에 가득한 빨간 제라늄
반쯤은 옷을 벗은 사람들이
비상계단에서 쉬고 있던
그곳에도 빨간 제라늄이 있었다.
말로 하기보다는
눈으로 보아야 하는 풍경
그것은
이 세상 다른 어느 곳에도 걸려있지 않은
화사하고 놀라운 그림 같은 것이었다.
/ 차알스 브꼬브스키(1920-1994) ‘그 모든’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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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은 종종 수많은 사물과 에피소드를 거쳐 한 정경에 머문다. 고향 풍경, 사랑의 기억, 여행지의 풍경들도 어떤 한 장면으로만 기억 속을 떠오르곤 한다. 그렇게 세월 속에 단순화된 기억은 깊고 환하다. 더운 여름날의 뉴욕에서 화자는 무엇 했을까. 그것은 알 수도 없고 중요하지도 않다. 다만 그곳에 제라늄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가난한 할렘을 배경으로 피어나는 빨간 제라늄, 그 안에 수많은 뉴욕의 이야기가 담겨 있는 것이다.
<임혜신/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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