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다이어리를 하나 산다. 대단한 브랜드 제품은 아니고 그냥 가까운 월마트 같은 데서 파는 레터 사이즈 절반만한 수첩이다. 일년 간 봐야하는 것이므로 겉표지는 최대한 화사하고 예쁜 걸로 사서 내 이름의 이니셜이나 포인트가 될 만한 스티커를 붙이고 표지 안쪽에도 아이들 사진을 붙이거나 마음이 따뜻해지는 명언을 써 넣는다.
올해는 마음에 쏙 드는 다이어리를 찾지 못해 끝내 직접 제작을 했다. 한 페이지는 달력, 다음 페이지는 메모, 이런 식으로 12월까지 그리느라 시간을 많이 투자해야 했다. 이메일과 연동돼서 버튼 하나만 누르면 달력이 펼쳐지는 멀쩡한 스마트폰을 놔두고 왜 사서 고생을 하느냐고 해도 나는 다이어리만은 촌스럽게 아날로그를 고집한다.
몇 년 전 셀폰을 새 것으로 바꾸다가 전화기 안에 저장되어 있던 파일들을 대부분 잃어버린 후 “역시 디지털은 믿을게 못 돼...” 하며 나의 다이어리 신봉은 더욱 확고해졌다.
가끔 예전의 수첩들을 꺼내놓고 내가 어떻게 하루하루를 살았는지, 누구를 만났는지, 무엇을 했는지 확인한다. 내가 직접 써 넣은 메모는 가장 쉽고 확실하게 나의 과거를 알 수 있는 기록이다. 몇 년 전 일까지 언제고 들춰볼 수 있으므로 기억력이 갈수록 빠른 속도로 퇴화하고 있는 나에게는 더 없이 소중한 기록이다.
어느 해에 유난히 자주 만난 사람도 있고, 그 사이 엄청 부자가 된 사람도, 벌써 고인이 된 분들도 있다. 그리고 어느 무렵 너무나 억울하고 분통이 터져 마음고생을 오래 했지만 지금은 어슴푸레 기억만 나는 일도 있고, 몹시 친하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연락을 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의 편집장이었던 수지 웰치는 <10-10-10>이라는 책에서 내게 어떤 일이 생겼을 때 10이라는 숫자로 판단해보라고 한다. 지금 내게 일어난 일, 그게 화가 나는 일이건 흥분되는 일이건 과연 10분 후까지 화를 낼 일인가, 10일 후에 혹은 10년 후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를 차분하게 따져보고 행동하라는 것이다. 그 당시에는 죽을 것처럼 괴롭고 미칠 듯이 화가 나도 시간이 흐르고 난 뒤에 보면 “내가 왜 그랬을까…”하고 후회하게 되기 때문이다.
올해 다이어리도 벌써 1/3을 써가고 있다. 이번 다이어리가 아름답고 행복하고 즐거운 일만 가득하기를 바랄만큼 철이 없지는 않다(연초부터 일복이 터져 마감 날짜들과 그걸 강조하는 빨간 밑줄로 채워지고 있는 중이다).
다만 다이어리의 작은 네모 칸에 기록되는 나의 매 순간이 부끄럽고 치졸하고 치사하지 않기를 바란다. 부질없는 욕망에 흔들려서 경거망동 하지 않기를,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는 삶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는 시간이 기록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또 알아가고 있다. 내가 보내는 매 순간이 나 혼자만 살아내는 시간이 아니라는 것을. 가족과 동료, 친구들, 이웃과 더불어 그들과 맺은 인연으로 나의 삶이 엮어 진다는 것을.
그래서 한 학기를 마무리 하고, 한 해를 마무리 할 때 기도한다. 내가 아는 사람들, 나와 만나는 사람들 모두에게 축복이 가득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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