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년 10월26일은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 역에서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에게 총격을 가한 ‘하얼빈 의거’일이다. 안 의사는 의거 직후 당당한 모습으로 자진 체포되어 6회의 공판 끝에 1910년 2월14일 사형을 언도 받고, 3월26일 오전 10시 만주의 여순 감옥에서 사형을 당하셨다.
옥중에 있을 당시 그의 어머니 조 마리아 여사는 진남포 본가로부터 동생 정근과 공근 형제를 보내어,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않는 것이 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사람 것이 아니니 몸부림하지 말고 의연히 버티라. 딴 마음 먹지 말고 떳떳이 죽으라, 뒷날 천국에서 뒤따라가는 이 어미와 반갑게 만나리라” 라며 장부의 위엄을 당부한다.
어머니의 기개가 남달랐던 영향이리라. 안중근뿐 아니라 함께 거사에 참가했던 우덕순, 유동하, 조도선도 상고를 하지 않아 두 속결 단심으로 사건의 막을 내렸다. 침략자들의 비열하고 뻔한 재판놀음에 매달리고 싶지 않아서였을 터이다. 더욱이 사형언도 직후 “안중근 얼굴에 미소가 올랐다”고 하니 그 위풍당당함에 일본 법정이 뒤통수를 맞은 셈이다.
알려진 대로, 황해도 해주 출신의 김구가 열아홉 청년 당시, 동학 농민의 연으로, 안중근의 집에 살며 그의 어머니의 큰 도움을 받고,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 진사를 스승으로 섬기고 성리학을 배웠던 적이 있다. 김구는 거기에서 평생 가장 신뢰하는 제2의 가족을 만나게 된다.
훗날 안중근을 포함한 세 형제는 김구가 임시정부 내에서 가장 신임한 인물들이었고, 모든 사건들에 김구와 직접적인 연결이 있었다. 이들의 혈연보다 진한 형제애는 다름 아닌 안중근 부모의 가정교육과 나라사랑의 올곧은 신념이 영향을 끼친 탓이었다.
백범 김구가 밀정 스치다를 주먹으로 때려죽이고 사형선고를 받아 서대문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일화이다. 어머니 곽낙원 여사가 황해도에서부터 달려와 면회를 신청하여, 사형집행을 기다리는 아들 김구에게 하셨던 감동의 말씀이 있다. “창수야! (김구의 아명) 나는 네가 경기 감사를 하는 것보다 자랑스럽다. 너는 나의 아들이고, 또 이 나라의 아들이다.”
김구는 목이 메어 아무 대답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참으로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다.
한반도의 평화를 꿈꾸던 도마 안중근과, 대한민국의 큰 스승으로 한국의 독립운동을 마무리해 낸 백범 김구. 두 사람의 뒤에는 언제나 태산 같은 어머니들이 있었다. 1910년 2월30일자 대한일보 매일신보는 안중근 의사의 사형 확정 소식을 다루며 독립 의사를 키워낸 어머니의 큰 기상을 기리는 취지의 “그 어머니의 그 아들” 이라는 뜻으로 시모시자(是母是子)라 대서특필한다.
조국 독립의 희망 하나만을 품에 안고 불구덩이 속을 전진할 수 있던 그들의 원동력은 평생을 바쳐 뒷바라지 해주신 훌륭한 어머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가정에서 보여주는 참교육이 자식들의 미래를 쌓아올린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귀중한 대목이고, 큰 교훈이다. 이 시대의 안중근 의사와 김구 선생과 같은 민족의 지도자를 키워내는 일이 어머니들의 손에 달려있다.
안중근 의사 순국 105주년을 맞아 아직도 끝나지 않은 한일 갈등의 거친 파도 앞에서 우리 모두 위대한 선조들의 헌신적 의거를 생각하고 본받을 때임을 느낀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