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일락에 세 들어 살던 날이 있었다
살림이라곤 바람에 뒤젖히며 열리는 창문들
비 오는 날이면 훌쩍거리던 푸른 천장들
골목으로 들어온 햇살이 공중의 옆구리에 창을 내면
새는 긴 가지를 물어 구름과 집 사이에 걸었다
그렇게 새와 바람이 그린 지도를 손가락으로
가만히 따라가면 하늘이 어느덧 가까웠다
봄날 라일락꽃이 방 안에 돋으면
나는 꽃에 밀려 자꾸만 나무 위로 올라갔다
주인은 봄마다 방값을 올려 달랬으나
꽃 피면 올라왔다가 꽃 지면 내려갔다
오래전부터 있어온 일, 나는 라일락 꼭대기에 앉아
골목과 지붕을 지나는 고양이나 겸연쩍게 헤아렸다
저물녘 멀리 마을버스가 들어오고 이웃들이
약국 앞 세탁소 앞 수선집 앞에서 내려 오순도순
모두 라일락 속으로 들어오면 나는 기뻤다
그때 밤하늘은 여전히 신생대였고
그 별자리에 세 들어 살던 날이 있었다
골목 안에 라일락이 있었는지
나무 안에 우리가 살았는지 가물거리는
/ 박지웅(부산 출생) ‘라일락 전세’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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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국과 세탁소와 수선집이 있는 우리에게 친숙한 그 골목, 그 안에 라일락꽃처럼 바람에 열리고 닫히던 빈자의 방이 있었다. 하늘과 별들, 그리고 빗물조차 흘러드는 그 작은 방에서 우리는 가난했지만 풍요했다. 사념 없는 마음, 욕심 없는 마음은 풍경을 얼마나 순하게 하는가. 세를 내기도 힘들었던 그 시절이지만 온 세상은 향기로운 생명의 꽃방이었다. 그런데 그 날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 우리 마음 속 무구한 행복의 라일락 나무는 어디로 간 것일까.
<임혜신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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