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게 소질은 없지만, 방에는 직접 그린 그림이 몇 점 걸려있다. 그 중 가장 오래된 그림은 당시 나름 유명했던 한 미술유치원 졸업 전시회를 위해 탄생된 작품이다.
다양한 어휘와 표현력 구사가 가능해진 후 조작된 작품 설명을 마치 진짜인양 몇 십년간 주장해오고 있지만, 실제 그 그림을 그리던 유치원생이었던 당시 상황을 사실 난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선생님은 주제를 주지 않으셨다. 다만 졸업 전시회라는 행사에 걸맞게 흔히 사용해오던 스케치북 대신 고급 천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해주셨고, 물감뿐 아니라 나뭇잎이나 모래 등 원하는 다양한 재료를 사용할 수 있도록 호의를 베풀어주셨다.
그때의 나는 뜻하지 않게 찾아든 자유가 달갑지 않았다. 미술에 큰 관심도 재능도 없었던 나에게는 예고 없이 닥친 작은 시련과도 같았다. 한 시간 정도 흘렀을까. 친구들의 캔버스에는 벌써 오색 찬연한 상상력들이 자유롭게 춤추고 있었다.
일정한 걸음으로 반 친구들의 작품을 둘러보고, 그들의 서투르지만 기발한 작품과 재치 있는 설명에 미소 짓던 선생님은 우려했던 대로 나에게도 다가오셨다.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새하얘 보이는 천 앞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나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시며, 뭐든 자유롭게 머릿속에 있는 것들을 표현해보도록 종용하셨다. 실패나 실수를 두려워할 것 없다는 고마운 메시지와 함께.
그날은 이렇다 할 소득 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졸업 작품 완성에 주어진 시간은 일주일 남짓. 잘해야 한다는 암묵적 부담감에 휩싸인 채 이튿날 다시 유치원에 도착했다.
캔버스보다도 더 하얗게 질린 머릿속을 진정시키며, 이렇다 할 계획이나 구도 없이 천 위에 무작정 풀칠을 시작했다. 풀이 마르기 전에 교실 안에 준비되어있던 모래를 좀 퍼다 부었고, 잠시 후 풀에 접착되지 않은 모래를 조심스레 거둬냈다.
우연의 도움을 좀 받아보고 싶었던 것 같다. 계획적이기보다는 즉흥적인 성향을 갖고 있던 한 꼬맹이의 귀여운 꼼수, 다행이 작은 힌트 같은 것을 얻을 수 있었다. 숲을 연상시키는 모래 형상을 바라보며 부족해 보이는 풀칠을 촘촘히 더해 더욱 큰 숲을 만들어보겠다는 구상을 했다.
하지만 뜻대로 완성하기에 기술과 실력이 부족했다. 점점 의도에서 벗어나고 마는 그림을 바라보며, 또다시 적잖은 막막함과 답답함을 느꼈다. 하지만 전시회 일정에 따라 어떤 형태로든 결과물을 내놓았어야 했던 나는 그때까지 완성된 그림을 천천히 바라보았다.
조심스레 짐작하자면,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의도치 않게 맞닥뜨리게 되는 일들에 크게 당황할 것 없다는 교훈을 처음 경험한 때가 말이다. 재능, 그러니까 스스로의 자원에 기댈 수 없는 상황에서의 최선의 지혜란 단순히 ‘당시에 가능한 시도와 노력을 행하는 것’이 아닐까.
놀랍게도, 내 작품은 결국 완성됐다. 누구나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사물을 정교하게 표현하는 스킬을 갖지 못한 나의 그림은 당시 친구들의 완성작들 사이에서는 흔치 않았던 추상화가 됐고, 선생님과 관람객들은 내 작품의 독창성을 칭찬해주었다.
지금 책상머리에 걸린 이 그림은 흡사 미지의 숲속으로 떠나는 한 마리의 새를 연상시킨다. 미지의 한해를 막 시작한 지금의 내 모습처럼 말이다.
<2015>란 작품을 막 시작했다. 어김없이 마주하게 될 여러 돌발 상황, 그리고 그로 인해 그 어느 해보다도 독창적이고 예술적으로 완성될 이 작품을 또다시 설렘으로 구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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