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용노동부와 한국고용정보원이 운영하는 채용정보 사이트 ‘워크넷’에 따르면 “성희롱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 하냐?”는 면접 질문에 대한 모범 답안은 “성에 대한 가벼운 말 정도라면 신경 쓰지 않겠고, 농담으로 잘 받아칠 정도의 여유도 필요하다고 생각 한다”이다. 불행히도 이 유용한(?) 모범 답안은 며칠 전 온라인상에서 논란이 되자 사이트 게시판에서 삭제되어 더 이상 볼 수 없다. 혹시 필요할 것 같은 분들은 미리 메모 해둘 것을 추천한다.
고용노동부를 너무 심하게 탓할 생각은 없다. 나 역시 얼마 전 친한 후배에게 비슷한 맥락의 조언을 했어야 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하고 있는 후배는 지나치게 매력적이고, ‘여동생’ 같고, ‘딸’ 같은 나머지, 같은 학교에서 박사과정 중인 한국 유학생, 소위 말하는 ‘남자 선배’로부터 언어적 성희롱에 시달린 바 있었다. 한 사람으로부터 비슷한 성희롱과 원치 않은 신체 접촉을 당해야 했던 내 후배와 몇몇 여자 유학생들은 결국 지도교수에게 보고하고, 대학에 정식으로 문제를 제기하기에 이르렀다.
이 과정에서 학교 측은 피해자 쪽에 사건을 어떻게 어떤 방향으로 다룰 지에 대한 선택의 여지를 주었는데, 첫 번째는 학교가 일종의 중재 위원회 역할을 하고 피해자와 가해자가 일종의 합의를 도출하는 것이며, 두 번째는 피해자가 공식적으로 학교에 피해상황을 접수하면 학교에서 위원회를 구성하고 그 위원회가 가해자의 문제 행동 여부와 경중을 판단, 결정을 내리는 방법이다.
둘 중 어느 옵션을 선택할지 고민했던 후배는 이런 저런 고민과 논의 끝에, 이를 개인적인 문제로 가져가는 첫 번째 옵션보다는 보다 공식적인 절차를 밟아 학교에 결정권을 넘기는 두 번째 옵션을 택하여 미국학교의 시스템에 문제를 맡겨보기로 했고 현재 일은 진행 중에 있다.
그러나 마침 국제학회 참석차 한국에서 오신 교수들과 학계 관계자들에게 이 사건을 언급하는 것은 어떻겠냐는 후배의 질문에는 나 역시 고용노동부와 같은 조언을 할 수 밖에 없었다. 한국의 정서상, 명백히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후배는 그저 예민하게 굴며 문제를 일으킬 소지가 있는 맹랑한 아가씨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박사학위 취득 후 후배가 그 다음 단계로 진입함에 있어서 학계 관계자들이 그에 대해 갖는 인상은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미국 대학과 한국 학계를 대상으로 한 일관성 없고 이중적인 조언이 나로서도 씁쓸하기 그지없는 일이었지만, 후배에게 이미지 손상을 무릅쓰고 보다 나은 사회를 위해 개인적인 위험을 감수하라고 할 만큼 무모한 선배가 되고 싶지도 않았다.
어지러운 생각의 마디마디에 최근에 벌어진 일련의 성희롱 사건들의 ‘일부’가 생각났다. 오늘도 내가 다녀온 워싱턴 DC 내 문제의 호텔에서 수행 중이던 어린 대사관 인턴을 성추행한 윤창중 전 대변인, ‘딸 같아서’라며 딸에게는 하지 않을 신체접촉으로 캐디에게 애정을 표현한 박희태 전 국회의장, 아내보다 예쁘다는 극진한 칭찬 카드까지 들이밀며 23살의 어린 캐디에게 무얼 바랐는지 당최 알 수 없는 신승남 전 검찰총장, 그리고 등등등.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이들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고, 어떤 법적인 처분을 받았는지는 내 기억 속에 남아있지 않다. 잠깐 언론에서 호들갑을 떨다가 그 순간이 지나가면 그 뿐이다. 이들은 왜 책임지는 것도 없는 것 같은지, 왜 성희롱 가해자는 공공의 적이 되지 않는 것인지, 왜 고용노동부와 나는 계속해서 이중적인 씁쓸한 조언을 해야만 하는지...질문이 꼬리의 꼬리를 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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