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수많은 규칙들과 기준들 속에서 살아간다. 가족이라는 작은 단위의 규칙들부터 학교라는 기관의 규율들, 그리고 더 나아가 사회의 법까지 한 사람의 인생엔 따라야 할 규칙들이 곳곳에 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
규칙들에 맞춰 살아가는 것이 익숙해서인지, 아니면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기준을 세우는 것이 불안한 삶을 살아가는 데에 어떠한 심리적 안락함을 제공해서인지, 사람들은 추상적인 이념 또는 감정에도 기준점을 만들곤 한다.
서점에는 올바르게 또는 행복하게 살아가는 방법에 대한 책들이 넘쳐난다.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르는 많은 도서들은 사회적으로 ‘인정’ 받은 인물들의 ‘성공 스토리’를 통해 상대적으로 ‘성공’하지 못한 (성공의 기준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독자들을 상대로 설교를 한다.
불완전한 상태로 불안정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누군가가 행복한 삶을 위한 규칙을 정해준다는 것은 좋은 위로가 될 수 있다. 사후에 대한 불안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전능한 (또는 전능하다고 믿는) 신을 섬기는 심리와 비슷할 듯싶다.
사춘기 시절 누군가가 나에게 어떠한 방법으로 살아가라고 방법을 제시하는 것에 강한 거부감이 들었었다. 수많은 매체들을 통해 나에게 설교하는 사람들의 빈 껍데기 같은 말들이 싫었었다. 명령하는 듯한 어투로 “~해라”로 끝나는 문장들을 내세운 자기계발서의 제목들조차 거슬렸다.
누군가가 이러한 책을 추천할 시에는 내 삶의 기준을마음대로 정하지 말라며 화를 내곤 했다.
그러나 요즘 행복이라는 이 추상적인 단어에 대해 생각할 이유들이 많아지며 앞서 말한 빈 껍데기의 설교들이 왜 우리 삶에 범람할 수밖에 없는지 조금은 이해가 되려 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 하지 않는가. 많은 사람들이 태어남과 동시에 가족이라는 작은 단위의 사회 구성원이 된다. 학교를 거쳐 사회로 나와 일을 하며 다른 ‘사회적 동물’들과 부딪치고 어울리며 살아간다.
다른 사람들이 만든 제도 속에 살아가야 한다. 결국 ‘사회적 동물’인 우리는 독립적인 정체성을 가질 수 없는 듯하다. 나는 내 정체성의 유일한 창조자라고 말할 수 있을까? 정체성의 독립성이 불가능한 ‘사회적 동물’인 사람은 결국 행복의 기준 또한 개개인이 독립적으로 결정할 수 없는 듯싶다.
사회의 제도들이 나의 정체성을 설립하는 토대가 되는데 어떻게 행복하고 올바르게 사는 방법을 내가 혼자 결정할 수 있을까? 사회구성원으로서 살아가는 데에는 규칙이 존재하는 데 내 삶의 주체로서 살아가는 데에는 규칙이 없다. 이러한 불안감이 결국 ‘성공한 삶’을 살아간다고 주장하는 다른 이의 이야기에 집착을 하게끔 하는 것이다.
그 ‘성공한’ 사람의 스토리가 내 삶의 치침이 돼서 나에게 소속감과 안락함을 준다면 그렇게 사는 것이 “나쁘다” 또는 “좋다” 하고 규정 내릴 것도 없고 그저 그렇게 따라 사는 것이 살아가는 방법 중 하나인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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