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서 광고 전공을 하고 첫 직장생활을 한 곳은 광고 대행사였다. 학생 신분을 벗고 드디어 공중파 방송에 나가는 광고를 내 손으로 만들 수 있을 거라는 부푼 꿈을 안고 시작한 회사 생활은 그러나 꿈이 아닌 현실이었다.
광고 기획 파트로 입사했지만 대학을 갓 졸업한 신입사원에게 맡겨지는 일은 기껏 복사나 팩스 보내기 등 잡다한 것이었다. 이 간단해 보이는 일도 처음에는 얼마나 진땀이 나던지… 간혹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기회가 있기도 했지만 하늘같은 광고주와 무시무시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광고 제작 감독)사이를 오가며 혼이나 안 나면 다행이었다.
그 당시에는 지면광고가 만들어지면 필름으로 현상해서 직접 신문사 광고국에 전달을 해야했다. 한번은 전국으로 나가는 광고를 만들어야 했는데 뉴욕, 시카고 등지로 나갈 필름을 골라 우편으로 부치고, LA 쪽으로 나가는 필름은 내가 직접 들고 가서 신문사에 넘겼다. 큰 광고 캠페인의 시작이라 다음날 신문을 받자마자 광고 확인부터 했는데, 이게 웬일인가! LA지역 광고가 들어가야 할 자리에 시카고 광고가 떡하니 실려 있는 것이었다.
아무리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그것은 명백한 시카고판 광고였다. 시카고 지역 신문에는 LA판 광고가 실렸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내가 필름을 바꿔서 보냈다는 믿고 싶지 않은 사실을 인정하며 하늘이 노래진다는 경험을 그때 처음 했다. 고객의 이미지 실추, 대행사의 손해배상, 당일 광고에 실려야 했던 딜러들의 항의 등 예상할 수 있는 결과와 반응은 다양했다.
광고주 쪽에서는 당연히 난리가 났고 회사에서도 줄줄이 책임을 물어 결정적인 실수를 한 나에게 문책이 떨어졌다. 나는 이 엄청난 사고를 어떻게 수습해야 할 지도 막막했지만, 내가 아주 기본적인 실수를 해서 회사에 큰 손해를 미치게 했다는 사실에 그나마 남아있던 자존감이 무너졌다. 그냥 조용히 사표를 쓰고 퇴사를 하는 것만이 방법인 것 같았다. 그날 저녁 직속선배가 같이 술이나 한잔 하자고 했다.
“힘내. 시간이 지나면 이런 실수, 그냥 웃을 수 있는 추억이 될거야…” 나는 당장 내일 어떻게 출근할 지가 걱정이었지만 묵묵히 선배 말을 들었다. “피하지말고 정면으로 부딪쳐. 그게 발전하는 길이야.” 그 다음날 나는 회사에 일찍 나가 각 신문사 광고국에 전화를 돌려 사정을 설명하고 다시 광고를 게재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다. 하늘같은 광고주한테는 직접 찾아가 용서를 구하고 대안을 제시했다. 이 모든 과정이 결코 순조롭지는 않았다. 토할 것 같이 팽팽한 긴장의 연속이었지만 당시 내가 할 수 있었던 최대의 노력과 선배의 도움으로 일은 마무리 되었다.
그 일이 있고 15년이 지난 지금도 닥치면 그저 피하고 싶은 일들이 있다. 한번도 안해본 일, 용기를 내야하는 일을 앞두고 내가 왜 이걸 하겠다고 했을까… 후회가 물밀 듯 몰려오는 경험을 아직도 한다. 하지만 한번 내가 맡아서 하기로 결정했으면 도망가지는 않는다. 그 이후로도 많은 실수를 경험했고 반대의 입장도 겪어 봤지만 연륜이라는 것이 조금씩 쌓이는지 이제는 정면 돌파를 할 때 처음만큼 아프지는 않다.
직장생활을 시작한지 얼마 안되는 친구나 후배가 갖가지 이유로 일이 힘들다고 털어놓을때 나는 “정면 돌파 하라”고 자신있게 조언한다. 내가 숱하게 겪고 직접 체험해서 얻은 결론이라 말에 힘이 실리는 것 같다.
15년 전, 내가 사표를 내지 않고온 몸으로 부딪쳐 얻은 배움이 오랜 시간 단련을 통해 오롯이 삶의 지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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