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일곱 살인 큰 아이가 어느 날 옷에 피를 묻혀 집에 왔다. 그리고는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학교에서 코피가 났는데 자기가 선생님께 말씀을 드리고 화장실로 가서 코를 잘 막았다고 설명했다. 코피가 한번 나면 잘 안 멈추는 탓에 작년까지만 해도 학교에서 아이를 데려가라는 연락이 자주 왔었다. 그런데 그 새 좀 컸다고 별일 아닌듯 말하는 아이가 약간 기특했다.
운동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독서가 유일한 취미인 큰 아이의 호연지기를 길러 준다고 근처의 태권도장에 보내기 시작했다. 한번은 따라가서 보니 아이가 발차기 연습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또 코피가 터져 하얀 태권도복에 뚝뚝 떨어졌다. 내가 가까이 있는 것을 알았을텐데 아이는 또 조용히 화장실로 가더니 화장지를 콧구멍에 구겨 넣고 돌아와 다시 연습을 시작했다. 아이가 이만큼 자랐구나… 마음이 뭉클했지만 이 정도는 당연하다는 듯 쿨한 엄마 역할을 하느라 표정 관리를 해야 했다.
대부분 강의가 오전에 끝나 오후에는 비교적 한가한 스케줄 임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을 이리저리 데리고 다니는 것이 매우 귀찮았던 나는, 이왕 형을 도장에 데려다 주는 김에 둘째도 보내자 싶어 아직 네 살이 채 안된 아이에게 형처럼 태권도를 해보면 어떻겠냐고 물었다. 둘째는 잠깐 흥미를 보이는가 싶더니 이내 안한다고 도리도리를 했다. 너무 무섭다는 것이 이유였는데 오히려 관장님이 보시더니 운동 잘하게 생겼다며 시켜보라고 하셨다.
처음 몇 번은 연습 시작 전에 울고불고 해서 민폐도 이런 민폐가 없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금방 익숙해 진 모양이었다. “차렷!”이나 “앞발차기” 등 평소에 쓰지 않은 단어들인데도 다른 아이들 하는 모습을 보며 눈치껏 잘 따라했고, 막내 짓만 하던 애가 맞나 싶을 정도로 태권도장에서는 자세를 꼿꼿이 했다. 짧은 다리로 “이얏!”하며 발차기도 그럴 듯하게 하고 사범의 구령에 큰 소리로 “옛쩔(yes, sir)”하는 막내를 보니 귀엽기도 하고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내가 ‘늘 그렇겠지’ 생각하는 동안 아이들은 변하고 성장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언제까지나 제 자리에 있을 수는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그냥 아이는 늘 아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조용하고 내성적인 첫째가 동화 구연 대회에 나가 큰 소리로 “내가 오늘 네 집에서 자야겠다!” 했을 때나, 엄살이 심한 둘째가 어느 날 “엄마, 난 괜찮아. 참을 수 있어...”하고 이야기 할 때, 놀람을 넘어선 감동 비스무레 한 것이 느껴진다.
엄마로서 그다지 밥을 잘해주는 것도, 간식을 잘 챙겨주는 것도, 잘 놀아주는 것도 아니면서 아이들에게 쓰여지는 시간을 아까워하며 틈만 나면 “너네들 빨리 커서 엄마 일 좀 하자”고 부르짖곤 했는데 어느새 이만큼 자란 아이들을 보니 괜히 서운하다. 문득, 이렇게 자라다 어느 날 “어머니는 제 일은 상관 마시고 어머니 일이나 하세요”하고 점잖게 이야기 한다면 살짝 슬퍼질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조금씩 자라는 아이들. 내 보호의 울타리보다 더 커가는 아이들. 자꾸 자라는 아이들을 멈추게 할 수는 없을 테니 아직 어릴 때 이 개구쟁이들과의 추억을 많이 만드는 수밖에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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