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초부터 더듬이가 긴 건 아니었어요
내 놓을 것 하나 없는 몸뚱아리 지탱하려고
허방다리 짚다 수없이 넘어지고
꼿꼿한 기둥하나 걸리기만 해라 아침마다 되뇌이다
길가에 서있는 당신을 처음 만났지요
당신은 걸어서 오라고 했지
만나는 기어서 갔지요
한 발 한 발 허공에 늘은 줄을 따라
집 한 채 들이고 세간을 풀었지요
행간에 창을 내고
한 땀 한 땀 문패를 새겼지요
새벽이면 피멍든 이슬
창 아래로 쏟아 내며 내민 촉수
당신의 허리를 칭칭 감았지요 몸을 뒤틀어야 피어나는 꽃
나중에 알았지요
당신에게 나를 묶는 일이 한나절이면 지고 마는
보라색 교태를 흘리는 일이란 걸
- 김양숙(1990 ‘문학과 의식’ 등단) ‘기둥서방 길들이기-나팔꽃’ 전문
덩굴 꽃들은 빼곡한 나무들 사이에서 빛을 받아내기 위해 진화된 아주 스마트한 편법 시스템이다. 곧고 굵은 줄기를 만들다가 도태된 나무의 수가 얼마나 많던가. 살아남기 위해 피멍든 이슬의 손으로 기둥나무를 감아 올라가는 나팔꽃은 열심히 살아가는 풍파 많은 여인을 닮았다. 편법이라는 점, 위태롭다는 점, 애절하다는 점, 그러나 어느 꽃 못지않게 곱고 튼튼하다는 점에서도 말이다. 참 재미있는 나팔꽃 상상이다.
- 임혜신<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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