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복 69돌 특별기획 시리즈 - 독립군 후손에게 듣는다
▶ <5> 유남수 선생 차남 유진희 씨
유진희(왼쪽) 뉴욕광복회 부회장이 부친 유남수 선생의 사진을 보여주며 독립운동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오른쪽은 부인 유정엽씨.
유진희 뉴욕광복회 부회장의 부친 유남수 선생과 큰아버지 유택수 선생은 독립운동 중 옥고를 치르고 목숨을 잃은 독립운동가 형제다.
유 부회장과 보훈처 등에 따르면 경기도 이천읍내에서 서당훈장을 하던 유창륙 선생의 둘째 아들인 유남수 선생은 조선일보 이천지국 기자로 활동하며 조국의 광복을 열망해오던 중 형 유택수의 설득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하게 됐다.이후 형제는 1926년 5월 참의부 특파공작원으로 국내에 입국한 이수흥을 도와 항일무장 투쟁을 벌였다.
그해 7월 경성의 동소문주재소를 습격했으며, 이어서 이천으로 내려와 백사면 일본경찰주재소와 백사면사무소를 습격하는 등 항일무장투쟁을 벌였다. 또 경성과 안성 등지에서 독립군 자금을 모금해 지원하기도 했는데 이 과정에서 경기도 안성 부호를 사살한 소위 ‘장호원 사건’을 감행하기도 했다.
장호원 사건은 경기도 안성의 부호인 박승륙이 독립군 자금 모집에 불응하자 그의 아들 박태병과 함께 사살한 사건이다.이 사건으로 일본 경찰은 서울과 경기도부터 충북, 강원도 일대까지 비상망을 펴고 수 천명의 인력을 동원해 수개월간 이들 형제를 수색했으며, 당시 2만원의 현상금이 걸려 수배되기도 했다.
수개월간 항일투쟁을 하던 형제는 돈에 현혹된 이수흥의 6촌형 이준성의 밀고로 1926년 11월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됐다. 형 유택수는 2년간 옥살이를 하다가 서대문형무소에서 28세의 젊은 나이에 순국했고, 유남수 선생은 2년간 옥고를 치렀다.
유 부회장은 “당시 큰아버지께서 아버지에게 ‘모든 사건의 혐의는 내가 질테니 너는 살아서 집안의 대를 이어가라’고 당부했다“며 ”그렇게 순국하신 큰아버지는 시신도 없고 유해는 국립묘지에 위패만이 안치돼 있어 후손으로서 너무 가슴이 아프다“고 말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유택수, 유남수 형제에게 각각 건국훈장 군민장과 애족장을 추서했으며, 고향인 이천에는 기념비를 세워 이들 형제를 추도하고 있다.
유남수 선생은 해방 후 한독당원으로 활동하던 중 6.25전쟁 발발직후 서울 신문로 자택에서 인민군들에 납치, 납북돼 현재까지도 생사를 확인조차 못하고 있다. 유 부회장은 “칠흑 같은 새벽에 인민군에 끌려가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마지막 기억”이라며 “납치 1년 전 김구 선생의 국민장 준비위원이셨던 아버지가 영정을 받들고 저희 집 앞을 지나며 저와 눈을 마주쳤던 순간은 영원히 지울 수 없는 회한의 장이 되고 말았다”고 말했다.<조진우 기자> A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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