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도수군통제사’- 신드롬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영화 ‘명량’- 그 명량 해전 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지닌 직함이다. 종2품 외관직의 무관 직책인 통제사는 전쟁이 만들어낸 직제다.
전쟁이 발발했다. 그러자 그 비효율성이 바로 드러난 게 각 도별로 별도의 지휘관이 병사를 지휘하는 체제였다. 때문에 새로 마련된 직제가 수군통제사로 경상·전라·충청도 등 3도 수군 지휘 통솔권을 부여한 것이다.
1593년 8월 이순신 장군은 초대 통제사로 임명된다. 그러나 얼마 못가 면직된다. 모함으로 투옥되고 만 것. 그 직책을 이어받은 것은 원균이다. 그러니까 2대 통제사가 된 것이다.
3도 수군 병력은 2대 통제사 때 거의 궤멸된다. 칠전량 전투에서 우왕좌왕하다가 160여 척의 전함이 깨지고 통제사 원균을 비롯해 1만여 수군이 전사를 한 것이다.
통제사는 오늘날로 치면 사실상의 해군참모총장 자리에 해당된다. 3도 수군이 당시 조선의 전체 수군병력과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조선은 해군력을 거의 다 상실했던 것이다.
이에 놀란 조정은 다시 이순신을 기용한다. 3대 통제사로 임명한 것이다. 그러나 남은 병력은 100명도 채 안됐다. 전선은 12척. 이 전력을 수습해 130여척의 일본전함을 깨트리고 승리한 전투가 명량 해전이다.
명량 해전과 직전의 칠전량 해전. 이 두 해전은 극도의 명과 암을 이루면서 새삼 한 가지 질문 던지게 한다. 하드웨어가 중요 하냐, 소프트웨어가 중요하냐의 질문이다.
이 3도 수군통제사란 직책은 이후 1895년 7월 통제영이 없어질 때까지 300년간 208대까지 이어진다.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할까. 3도 수군통제사란 직책은 그 직제 마련 동기와는 동떨어진 전혀 예상치 못한 역할도 맡게 된다.
“조선은 임진, 정묘 년의 수치설원을 위해 대대적인 침공태세에 있다.” 임진왜란 후 히데요시 정권 패망과 함께 들어선 도쿠가와막부가 초기에 내건 슬로건이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고 했나. 임진왜란 이후 3도 수군통제사 휘하 병력은 한 때 30만에 육박한다. ‘조선의 대군양성을 도쿠가와 막부는 철권통치강화의 구실로 삼았던 것이다.
삼도수군통제사는 조선조 후기로 접어들면서 급기야 원성의 대상이 된다. 토지세인 전정(田政), 군역을 포(布)로 받는 군정(軍政), 정부의 구휼미 제도로 사실상 고리대금업이 돼버린 환정(還政) 또는 환곡(還穀)- 이 삼정이 극도로 문란해지면서다.
삼도수군통제사는 해상안보의 지휘탑 이라기보다는 ‘황금방석’의 자리가 되고 만 것이다.
‘하드웨어가 중요한가, 소프트웨어가 중요한가’- 여기서 앞서의 질문으로 되돌아간다. 이 질문에 숙종 시대의 명신 민정중은 이렇게 답했다. “적을 막는 길은 오로지 장수다운 사람을 얻느냐 못 얻느냐에 달려 있다.”
시스템도 중요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인사(人事)라는 이야기다. ‘결국은 인사가 만사다’-. 400여 년 전 명량 해전 스토리가 주는 뼈저린 교훈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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