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다. 아침저녁으로 ‘내가 과연 LA에 살고 있는가’하는 의심이 들 정도의 추위가 찾아왔다. 추위를 느끼면 우리는 본능적으로 따뜻함을 갈구하게 된다. 쌀쌀한 연말이 되면 어김없이 온색의 장식이 즐비해지는 겨울거리를 바라보며, 익숙지 않은 자극은 어떻게든 상쇄시켜내려고 하는 인간의 무의식적인 열심과 집요함에 새삼 놀라게 된다.
‘유동적 현대(Liquid Modernity)’란 용어로 ‘현대의 우울’을 지적한 지그문트 바우만 (Zygmunt Bauman)이라는 사회학자가 있다. 그가 말하는 ‘유동성(Liquidity)’은 ‘불확실성’에 가깝다. 그는 현대인들을 안정시키지 못하는 우울의 근원을 ‘유대를 불가능하게 하는 지나친 유동성의 추구’에서 찾았다.
그의 한 비유를 들어 자세히 설명하자면, 휴대폰은 서로 떨어져 있는 사람들이 접촉할 수 있도록 도와주지만, 동시에 이미 접촉하고 있는 사람들이 따로 떨어져 있을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한다. 이런 의미에서 ‘휴대폰’은 그의 말대로 유동적 현대사회에 피어난 ‘악의 꽃’인 셈이다.
그는 현대사회의 유동성을 관계로 확장시켰고, <리퀴드 러브>란 책을 발표했다. ‘사랑하지 않을 권리’와 ‘현대의 우울과 고통의 원천에 대하여’란 부제가 붙은 이 책에서 바우만은 ‘지구화’와 ‘개체화’를 동시에 감당해야 하는 현대인들이 어쩔 수 없이 갖게 되는 ‘인간관계(혹은 사랑)’의 혼란을 지적했다.
SNS 등으로 상징되는 범지구적 관계망이 오히려 관계의 허망함과 거짓됨을 연상시켜, 끝내는 인간관계의 사막화를 부추긴다는 의미다. 더불어 사람들로 하여금, 이미 유동적인 세계에서 유동성을 더욱 가중시킬 유한적인 인간관계를 추구할 필요가 없다는 슬픈 결론에 이르게 한다고 우려했다.
이는 결국 원천적 고독과 외로움을 갖고 있으면서도, 지속적인 관계는 두려워하는 이중성의 양상으로 드러난다. 그럴수록 우리는 ‘힐링’이란 단어에 더욱 집착하게 되고, 잠시나마 유대감을 줄 수 있는 무언가를 찾아 유랑하고 헤매다 비정상적으로 집착하게 된다. 말 그대로 악순환이다.
그의 주장이 사실임을 쉽게 부인할 수는 없다. 단적인 예로, 우리는 ‘결혼’ 같은 관계의 지속성이 두려워 인스턴트식 관계에 침식되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이미 식상할 정도로 보아왔다. 이에 대해 그는 “사랑이 영원을 향해 던지는 그물이라면 욕망은 그물을 짜는 성가신 일을 피하기 위한 전략이다. 본질 그대로 사랑은 욕망을 영속화하려고 애쓴다. 그러나 욕망은 사랑의 족쇄를 피하고 싶어 한다”고 단언했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현대인의 우울’에 대한 지적과 우려는 부쩍 추워지는 계절에 부각된다. 뜨거운 여름날에 쉬이 떠올리게 되는 감정은 허무함보다는 무료함이다. 그런 방향으로 조심스레 짐작해보자면, 냉랭한 해류는 현 세대를 서로에게서 떼어놓는 듯하지만, 동시에 멀어지지도 못하게 한다. 이것이 ‘그렇지 않아도 복잡한 인간의 감정과 이 복잡함을 더욱 강화시키는 현대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이유로 ‘사랑하지 않을 권리’를 외치는 바우만의 강력한 논리에도 자그마한 희망을 놓지 못하는 이유이다.
현대인들은 정말 ‘사랑’과 ‘믿음’과 같은 고귀한 단어들을 살아낼 수 없는 걸까? 새해를 앞둔 지금, 주어진 또 한 번의 기회에 이전보다 더욱 간절해진 기대를 걸어본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