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았느냐와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비춰지느냐는 가끔 매우 다를 수 있다. 일반인도 그렇지만 정치인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미국 역사상 그 차이가 존 F 케네디만큼 큰 사람도 없을 것이다. 정치 명문가에서 태어나 역사상 가장 어린 나이(43)로 대통령에 선출된 그는 젊음과 스태미나가 넘치는 쾌남이었다. 미모의 영부인 재클린과 젊은 참모들에 둘러싸인 그의 백악관은 옛날 영국 아서 왕의 궁전 ‘캐멀럿’을 연상시켰다.
그러나 이런 화려함 뒤에는 남모르는 그만의 고통이 있었다. 그는 2차 대전에 참전했다 얻은 척추 질환으로 평생 고생했다. 수시로 찾아오는 극심한 통증을 견디기 위해 수많은 약을 먹었고 3명의 주치의가 교대로 그를 돌봤다. 그 외에 애디슨 병과 타이로이드 장애, 고혈압으로 과잉 행동과 불안 증세까지 보였다. 그의 수많은 여성 편력도 이를 잊기 위한 방법의 하나였는지 모른다.
그는 많은 미국인들 사이에 인기 있는 대통령이었지만 냉정하게 업적만 놓고 보면 1급은커녕 2급에도 들기 어렵다. 그가 취임하자마자 쿠바의 카스트로 공산 정권을 무너뜨리겠다고 쿠바 반군을 시켜 시작한 ‘돼지만(Bay of Pigs) 침공’ 사건은 재난으로 끝났다. 쿠바에 상륙한 반군들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 채 정부군에 의해 사살되거나 체포됐고 사태가 불리하게 돌아가자 미국은 애초 지원 약속을 저버리고 반군들을 포기했다.
훗날 미국이 쿠바 미사일 사건 때 핵전쟁을 불사할 정도로 강경하게 나간 것이나 프랑스가 손 털고 나간 베트남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게 된 것도 이 때의 참패 영향이 컸다. 더 이상 공산주의자에 밀린다는 인상을 줄 경우 케네디 자신은 물론이고 미국이 설 땅이 없어지게 된다고 판단한 것이다. 쿠바 미사일 위기는 다행히 평화적으로 수습됐으나 베트남 개입은 훗날 미국 사회에 엄청난 후유증을 불러 오게 된다.
실패로 끝날 것처럼 보였던 케네디 행정부를 구해준 것은 그의 암살이었다. 그를 살해한 하비 오스왈드는 공산주의 추종자로 소련으로 망명해 4년간 살다 그곳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미국으로 다시 돌아온 자다. 케네디를 암살하기 며칠 전에도 멕시코의 쿠바 대사관을 찾아가 쿠바 공산 혁명을 돕겠다며 비자를 신청했다 기각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당시 미국 언론은 그의 죽음을 우파와 군사 카르텔의 음모로 몰아갔고 그는 사회적 약자와 소수계 인권을 위해 싸우다 살해된 순교자로 묘사했다. 그의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된 린든 존슨은 그의 유업을 잇겠다며 흑인 등 소수계의 투표를 보장한 연방 투표법과 민권법을 통과시키고 ‘위대한 사회’란 이름으로 메디케어와 메디케이드 제도를 만들었다.
22일이면 케네디가 달라스에서 암살된 지 꼭 50년이 된다. 그의 죽음을 조사한 워런 위원회는 그의 암살이 오스왈드 단독 범행이란 결론을 내렸지만 아직도 미국민의 66%는 그가 음모에 의해 살해된 것으로 믿고 있다. 그의 죽음을 둘렀싼 미스터리는 영원히 풀리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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