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0년 중국 길림성 집안(集安) 숲속에서 한 거대한 석비가 발견됐다. 한 중국인 농부가 우연히 발견한 이 석비 소식은 당시 조선과 중국 각지에 특수 공작대를 비밀리에 파견한 일본 육군 참모본부 안테나에도 걸려들었다.
당시 일본은 부국강병의 근대화 정책을 맹렬히 추진하면서 조선과 중국을 침탈하기 위해 우선 군사·외교적 침략에 치중했다. 그런 다음 이웃의 역사를 파괴하고 날조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그들이 이웃보다 앞선 나라임을 억지로라도 꿰맞추기 위해서였다.
이런 정황에서 1883년 가을 압록강 주변의 남만주일대를 정탐 중이던 참모본부 소속 사꼬오 가게노부(酒句景信) 중위는 그 석비의 비문(碑文)을 탁본해 일본으로 가지고 갔다.
일본 육군 참모본부는 이 비문을 해독한 결과 크게 낙담했다. AD 4-5세기 무렵 고구려·백제·신라 3국은 정치나 문화나 군사적인 면에서나 당시의 왜(倭)보다 일방적으로 우세한 것으로 드러난 것이다.
참모본부는 고심했다. 그런 역사적 증거를 없애기 위해 비석 폭파까지 생각 했다. 그러다가 꾀를 냈다. 비문의 자구(字句)를 첨삭해 내용을 조작하자는 얘기였다.
6년의 세월이 걸린 후 일본 육군 참모본부는 그 비문해석을 공개했다. 왜가 고구려·백제·신라의 조공을 받았을 뿐 아니라 신라를 정벌해 가야에 임나일본부를 설치했다는 내용이었다.
이상은 일본군국주의자들의 광개토대왕 비문 날조 경위다. 그 목적은 한반도는 예부터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주장을 합리화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지난해 7월 중국 길림성 집안(集安) 근처에서 제2의 광개토대왕 비석이 발견됐다. 그 소식에 한국의 학계는 흥분했다. 한국 언론은 중국 문화재 당국에 고구려비 참관 취재를 신청했다. 그러나 거절당했다.
그 비문의 탁본이 한국의 학계에 보내진 것은 지난 2월이다. 이 비는 광개토대왕 시기에 건립된 아마도 최고(最古)의 고구려비일 것이란 점을 제외하고 한국과 중국 학계는 그 해석을 둘러싸고 벌써부터 의견이 분분하다.
어쨌거나 한국 언론의 참관조차 허용치 않던 중국이 그 고구려비의 탁문을 보내고 한국의 사학자들이 그 탁본을 토대로 연구발표를 하게 된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그러나 찜찜한 구석이 없는 것도 아니다. 중국에서 제2의 광개토대왕비 연구가 동북공정에 참여한 대표적 학자들이 맡았다는 점에서다.
역사 왜곡이란 부문에서 중국은 그 시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국에 좋지 않은 사료는 채택하지 않는다는 게 중국의 전통적 역사기술법이다. 최근 들어서는 그 도가 지나쳐 온갖 공정이란 이름으로 아예 고대사를 날조하고 있어 하는 말이다.
일제의 광개토대왕 비문 날조에 이어 제2의 비문 파동이 일어나지 않을까. 벌써부터 그게 걱정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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