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업계 1호 이태권 동네방네 부동산 대표
“70년대에는 집을 사면 아무개가 집들이 파티 했다고 한인신문에 날 정도였습니다. 요즘 같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죠.”이태권 동네방네 부동산 대표(74)는 자타가 공인하는 워싱턴 부동산업계의 산 역사다. 그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워싱턴 지역 동네와 골목마다의 생생한 역사가 살아 튀어나오는 듯하다.
“당시엔 집 사면 신문에 났죠”
워싱턴 에이전트 1호는 스미스 김씨
그가 부동산업에 뛰어든 건 1972년. 용산고와 외국어대를 마치고 노스웨스트항공(NWA)에 근무하다 68년 유학차 도미한 그는 부동산업에서 아메리칸 드림의 서광을 봤다 한다.
“가난한 고학생이었습니다. 헌집을 수리하는 회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 보니 주택을 보는 눈이 뜨이더라고요. 이 방면의 전망이 좋을 것 같아 공부하던 무역과를 그만 두고 노던 버지니아 커뮤니티 칼리지에서 부동산을 전공했습니다.”
직원이 60명이나 되던 메이저 리얼티(Major Realty)에 들어간 그는 73년 4월 정식으로 버지니아 주에서 라이선스를 따냈다. 리치몬드까지 가서 시험을 봐 합격한 것이다.
그러나 이 대표가 워싱턴 부동산 에이전트 1호는 아니었다. 그에 따르면 한인 중에서는 경남여고를 나온 스미스 김씨가 1호였다. 미국인과 결혼했던 김씨는 DC에서 부동산업에 종사했으나 대부분 미국인 고객들을 상대했으며 한인사회에는 좀처럼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한다. 그보다 몇 개월 앞서서는 최동현 씨(미국명 도널드 최)가 미국인 회사에 잠시 일하기도 했다. 최 씨(84)는 서울대 인문학부를 졸업한 후 합동통신사와 동양 통신사에서 기자로 활동했으며 ‘미국의 소리(VOA)’ 방송에서 근무한 적도 있었다. 역시 언론인이었던 고 문명자 씨가 부인이다.
“백인만 거주 가능” 인종차별도
한인 이민자들이 늘기 시작하면서 그는 74년경 훼어팩스의 R50 선상에 있는 현 뉴스타 부동산 빌딩에다 개인 사무실 문을 열었다. Major Realty란 상호 아래에 ‘이태권 부동산 주식회사’란 한글 상호도 당당히 달았다.
“당시만 해도 미 시민권자가 아니면 에이전트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게 75년경부터 바뀌어 개방되면서 한인 에이전트들도 늘기 시작했어요.” 70년대 중반 한인 에이전트로는 맥 최, 변만식, 이설명, 채완제 씨 등이 활동했다 한다.
이 대표의 비즈니스는 술술 풀려나갔다. 노던 버지니아의 탑 세일즈맨 후보에 오르기도 하고 회사 내 전체 에이전트 중에서 1등도 차지했다. 77년에는 한인 중 가장 먼저 브로커 라이선스를 취득하기도 했다.
“예나 지금이나 한인들만큼 집 소유욕이 강한 민족이 없습니다. 이민 와서 아파트에 한 5년 살다 돈이 조금 모이면 가장 먼저 하는 게 집을 사는 겁니다. 자기 집을 갖는다는 건 기반을 잡았다는 자부심의 표시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미국생활에는 늘 빛만 있는 건 아니었다. 당시에는 인종차별의 설움이란 그림자가 그와 한인들 뒤를 따라다녔다.
“70년대는 DC의 아파트에 살다가 자리 잡히면 노던 버지니아의 알링턴이나 메릴랜드의 몽고메리 카운티 등으로 이사 가는 게 패턴이었어요. 그런데 아파트에서 이런저런 이유로 한인들에는 방을 잘 안줬어요. 한번은 신문에 난 광고를 보고 찾아갔더니 방이 없다는 핑계를 대며 거절해 화가 난 적도 있었습니다. 또 어떤 분이 알링턴에 주택을 사게 돼 계약을 하는데 집 문서를 살펴보니 ‘백인만 거주 가능’이라 적어놓은 걸 줄로 그어놓았더라고요. 케네디 대통령 이전에는 주택에서조차 공공연한 인종차별이 있었던 거죠.”
다시 작은 집 추세로 바뀐다
지금으로부터 40년 전인 70년대 중반의 주택가격은 얼마나 했을까. 이태권 대표에 따르면 한인들이 소유하고 싶은 3베드룸 싱글 홈의 평균 가격은 5만 달러가량이었다. 버크 가까운 킹스팍의 싱글 홈이 5-6만 달러, 타이슨스 코너 인근의 작은 집은 2만5천 달러, 구 비원식당 근처는 3만-3만5천 달러 수준이었다. 지금과 비교하면 10배 이상 차이가 난다.
“그때는 지금처럼 대형 주택이 별로 없었어요. 3베드룸의 아담한 벽돌집이면 최고였지요. 정부에서도 주택구입을 많이 권했어요. 융자도 잘 해줬는데 이자는 9%정도했습니다. 보통 20%정도 다운페이하고 집을 샀지요.”
주택시장은 70년대 말을 거치며 한동안 얼어붙었다 한다. 모기지 이자가 20% 이상 치솟으며 융자받기가 겁이 날 정도였다. 그러다 레이건 정부가 들어서면서 융통성 있게 융자를 해주는 ‘크리에이티브 파이낸싱’이 처음 등장하고 안정세를 찾아갔다 한다.
세월이 지나며 한인 부동산업계도 큰 변화를 겪었다. 40년 전 열손가락으로 꼽던 한인 에이전트는 2000년대 중반 호황기에는 1천명대 규모로 늘어났다. 부동산회사도 급증했다. 한인들의 주택에 대한 인식도 크게 바뀌었다.
“70년대만 해도 주택이란 그저 ‘내 집’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다 80년대 중반 들며 그간의 거주 개념에서 투자 개념이 도입되기 시작했어요. 내 집도 마련하고 집값 오르는 것도 계산해서 집을 고르고 사는 거지요.”
2000년대 초중반의 주택 광풍을 지켜보던 그는 너도나도 ‘묻지마 투자’에 나선 한인들에 닥쳐올 위험성을 감지했다. 허나 그로서도 어쩔 수 없는 거센 바람이었다.
그는 여전히 현역이다. 80년대 중반 회사 이름을 ‘동네방네 부동산’으로 아예 한글로 바꾸었다. 세븐코너 인근에 있던 사무실은 오래 전 문을 닫고 요즘은 훼어팩스 자택이 사무실이다.
“요즘 많이 물어보시는 게 집값이 어떻게 될 건가, 이런 겁니다. 주택시장에 이제 거품은 없을 겁니다. 인구가 증가하니 집값은 꾸준히 오르겠지만요. 집도 대형화 추세가 꺾이고 다시 작은 공간에서 편안함을 추구하는 트렌드로 바뀔 겁니다. 그리고 한인들만큼 집에 대한 집착과 애환이 많은 사람들이 어디 있겠습니까. 한인들의 집 사랑은 변함없을 겁니다.”
지난 40년 동안 수많은 집이 그의 손을 거쳐 갔다. 부모에 이어 걸음마를 막 뗐던 자녀가 고객이 됐고 이제는 손주 세대까지 그에게 전화를 한다. <이종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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