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결혼 여성들의 대모, 준 도슨 한미여성재단 고문
“버스 타니 흑인·백인 좌석이 따로 있어
어디 앉을지 몰라 택시타고 타녔어”
“지금은 없는 게 없어. 마트에 식당에 찜질방까지, 천국이야. 그러나 인심도 없고 정도 메말랐어요. 그때는 없이 살아도 서로 정 나누고 살았는데.”
그를 뭐라고 정의할까? 워싱턴 국제결혼 여성계의 산 증인이자 대모(代母). 이보다 더 정확한 표현을 찾긴 힘들 것이다. 준 도슨(81, June Dawson) 한미여성재단 고문. 1952년 한국전쟁이 한창일 때 도미했으니 벌써 61년째 미국생활이다.
콜라, 핫도그 몽땅 25센트
부산의 한 유치원 보모로 있던 어느 날, 학교로 피난민들이 들이닥쳤다. 전쟁이 난 것이었다. 학교는 문을 닫아야 했고 갈 데 없던 그에게 국제연합 한국재건단(UNKRA)에서 일할 기회가 주어졌다.
“영감을 거기서 만났어요. 육군 소속으로 UNKRA에 파견 근무 중인데 날 만난거지. 미국 올 팔자였나 봐. 당시만 해도 미국 가는 건 하늘의 별 따기였어. 결혼 안하면 미국 못 간다기에 결혼 하고 바로 미국 왔어요. 내가 한국 여권 번호 927호야.”
부산에서 배를 타고 시모노세키에 도착한 다음 기차 편으로 요코하마에 도착했다. 다시 프로펠러 비행기를 타고 하와이를 거쳐 캘리포니아에 내렸다. 그게 52년 6월이었다. 버지니아 주도인 리치몬드 인근에 살다 남편의 근무지를 따라 독일과 프랑스에서 3년, 하와이 2년, 그리고 미국을 돌아다니다 버지니아 포트 벨보어에 정착한 건 1960년 무렵이었다.
가난한 동방의, 그것도 전쟁의 참화 속에 빠져 있던 나라에서 온 그에게 50년대 미국은 별천지였다. 하지만 그는 인종사회란 낯선 문화와 만나 혼란 속에 빠져들기도 했다.
“화장실에 가보니 백인, 흑인 칸이 따로 있어요. 화장실이란 데도 돈 넣어야 문이 열리게 돼 있고 말이야. 한번은 버스를 탔는데 흑인은 뒤 칸이고 백인은 앞 칸에 타게 돼 있어. 어디에 앉아야 할 지 모르겠더라고. 한참 서서 고민하다 그만 다음 칸에서 내렸어. 남편에게 물어보니까 그냥 앞에 앉으라고 해. 그래도 영 어중간해서 택시타고 다녔어.”
당시 물가에 대해 그는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콜라와 핫도그, 감자 칩 모두에 25센트 했다 한다. 5달러 내외하는 요즘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또 집안일을 돕는 흑인에게 하루 종일 일하고 나면 50센트를 줬다고 한다. 당시 흑인들은 하루 일해 두 끼 간신히 해결할 보상을 받을 만큼 열악한 처지였다.
한인사회 해결사 역할
그는 60년대 중반 한미부인회와 인연을 맺는다. 1963년 7월, 국제 결혼한 한인 여성 8명이 모여 만든 단체였다. 83년 이름이 바뀐 한미여성재단의 전신이었다.
“한국 사람이 너무 그리웠어. 한미부인회가 있단 말을 듣고 들어간 거야. 처음엔 한인 식당이나 그로서리가 없으니 집에서 주로 모임을 했어요. 대사관에서도 일이 생기면 먼저 우리한테 연락했어. 한국 여자가 미국인 남편한테 매 맞았다는 신고가 들어왔는데 해결 좀 해달라는 전화도 있었고…당시만 해도 대사관에서 미국사회를 잘 모르니까 우리가 해결사 역할을 한 거지. 유학생들도 김치나 한식이 먹고 싶으면 우리에 전화를 할 정도였어. 당시만 해도 국제결혼한 여자들을 보는 이미지가 안 좋아 한인회보다 더 열심히 했던 것 같아.”
한미부인회는 명실 공히 이웃사촌 같던 워싱턴 한인사회의 친정어머니 역할을 도맡았다. 낯설고 물 설은 타국에 사는 국제결혼 한인여성들이 서로 기대고 권익을 위한다는 취지를 넘어 한인사회와 주류사회 봉사에도 앞장섰다.
67년 유학생으로 워싱턴에 온 이기춘 씨는 “대사관 직원, 유학생과 그 가족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워싱턴 한인사회에서 한인부인회는 두드러진 존재이자 모범이었다.”며 “70년대 들어 엄청나게 늘어난 한인사회는 이 단체의 희생과 봉사가 아니었다면 그 성장이 한결 힘들고 더디었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펄벅 여사와의 인연
준 도슨 고문은 에드워드 전, 수영 휘태커, 에드워드 전 회장에 이어 68-69년 4대 회장을 맡았다. 이어 86-87년과 95년 등 모두 세 차례 한미부인회(한미여성재단)를 이끌었다.
70년대부터 한국에서 이민자들이 몰려오면서 한미부인회의 역할도 커졌다. 자신들이 초청해온 가족들은 물론 한인 초기 이민자들의 영어 통역, 아파트 마련, 장보기, 살림 장만, 자동차 운전면허 취득, 직장 주선 등 미국생활 정착에 하나부터 열까지 회원들의 손길이 닿았다.
이도영 워싱턴한인회장 재임시 DC에 한인회관을 구입할 때에는 모금파티를 열어 5천 달러란 거금을 쾌척하기도 했다. 80년대 중반에는 한국에서 혼혈아 입양사업을 추진해 12가구 30명을 미국으로 데려와 정착을 도왔다.
“너무 힘들었어요. 누가 회장하라 하면 서로 못한다고 버텼어. 그래도 젊으니까 할 수 있었어요. 에너지 넘칠 때니까.”
주류사회에도 따뜻한 손길을 내밀었다. 헌옷을 수집해 꿰맨 다음 양로원에 갖다 주고, 노인들의 머리와 손톱을 손질해주는 등 사랑을 전했다. 노벨문학상에 빛나는 ‘대지’의 작가 펄벅 여사와 인연을 맺기도 했다. 64년 설립한 펄벅 재단은 한국의 고아 등 헐벗고 차별받는 아동들을 데려와 새로운 인생을 살게 해주었다.
“70년대 초반에 우리가 버스를 대절해 펜실베이니아에 있는 펄벅 재단을 방문했어요. 돈도 기부하고 아이들 씻겨주고 돌봐주다 오곤 했지. 펄벅 여사는 우아하고 멋있는 분이었어요. 그분이 얼마 뒤 돌아가시는 바람에 인연이 끊겼지요.”
분열의 아픔
시련도 있었다. 81년 회장 선거 후유증으로 한미여성재단이 갈라진 것이다. 함께 해오던 분들이 워싱턴여성회를 설립했다.
“그 땐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어. 지금도 생각하면 가슴 아파요. 그만 두고 싶어도 국제결혼 단체가 있어야 한다는 의무감에 그럴 수도 없었어. 60달러로 다시 시작했어요.”
89년에는 데일시티에 여성보호소(쉘터)를 마련해 가정폭력 등으로 박해받는 여성들을 지켰다.
그의 개인사는 한미여성재단의 역사이자 한인사회의 아름다운 자취였다. 준 도슨 고문은 지금도 매월 애난데일의 한미여성재단 사무실에서 열리는 월례회에 참석한다. 팔순의 나이이지만 한 번도 지각한 일이 없다. 후배들을 격려하고 다독이고 후원하는 것도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은영재 현 회장은 “언니(준 도슨 고문)는 재단의 영원한 표상이자 후배들의 귀감”이라며 “언니의 남다른 사랑으로 재단은 굳건히 설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재단의 후원자 역할 외에 비즈니스에도 뛰어들어 강인한 한인 이민여성상을 보여주었다. 처음 우드 브리지와 알렉산드리아 등지에서 미장원을 17년간 운영하다 가발가게도 했다. 한국의 가족들이 온다기에 가족생업을 위한 한 방편으로 미국인 상대 식당을 12년간이나 운영하다 예순 두 살에 은퇴했다. 거의 20년 전이다.
준 도슨 고문은 “세월이 너무 빨라요. 엊그제 미국 온 거 같은데…”라며 “세월이 흐르더라도 한인들끼리 정을 나누고 서로 돕고 살았으면 좋겠다”고 소박한 소망을 밝혔다.
<이종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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