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해 개봉해 흥행기록을 세운 영화 ‘광해’는 역사 속의 문제적 인물인 광해군을 재조명하는 계기가 됐다. 광해군은 영창대군 등 혈육들을 죽이고 영창대군의 어머니인 인목대비를 유폐시키는 패륜을 저지르다 권좌에서 쫓겨난 ‘혼군’(나라를 어지럽힌 군주)으로 역사에 기록돼 있다.
그러나 오랜 세월 폭군으로만 각인돼 왔던 광해군은 학자들의 연구를 통해 새로운 평가를 받고 있다. 명과 후금 사이에서 ‘실용주의 외교’를 펼쳤다는 것이다. 광해군에 대해서는 폭군이라는 부정적인 시각이 여전히 우세하지만 그에게 덧씌워진 이미지의 상당 부분이 그를 몰아낸 반정세력들에 의해 만들어 진 것임은 부인하기 힘들다.
흔히들 역사를 ‘승자의 기록’이라고 한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역사가 모두 진실은 아니다. 역사는 권력의 이해관계와 정치 사회적 이유 등으로 왜곡되고 은폐되는 일이 흔하다. 권력을 쥔 세력으로서는 자신들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반대세력을 악의적으로 평가하고 기술하고 싶은 유혹에 빠지게 된다. 그렇기에 역사적 사건과 인물을 두고 시대마다 다른 해석이 나오는 것이며 때로는 날조된 역사 속에 숨겨진 진실이 드러나기도 한다.
영국의 왕들 가운데 가장 사악한 인물로 꼽혀 온 리처드 3세(1452~1485)의 유골이 최근 발견되면서 그의 실체를 둘러싼 역사논쟁이 다시 달아오르고 있다. 리처드 3세는 요크 왕가의 마지막 왕이었다. 그는 에드워드 4세의 막내 동생으로 형이 죽은 후 왕위에 오른 조카 에드워드 5세를 섭정하다 왕과 그의 동생 등 조카 2명을 런던탑에 가두고 스스로 왕위에 오른 인물이다. 조카인 단종을 폐위하고 왕위에 올랐던 세조의 영국판인 셈이다.
리처드 3세는 왕위에 오른 후 2년 뒤 반대파와의 전투 중 사망했으며 전쟁에서 승리한 헨리 튜더 백작이 왕이 되면서 튜더왕조가 시작됐다. 튜더왕조의 입장에서는 리처드 3세를 쫓아낼 수밖에 없었던 정당한 사유가 필요했으며 리처드 3세에 대해 부정적인 기록을 남기는 것은 이를 위한 첫 번째 작업이었을 것이다.
이후 지금까지 수백년 간 리처드 3세에게는 “권력을 위해 조카들까지 죽인 탐욕스럽고 사악한 꼽추 왕”이라는 묘사가 따라다녔다. 그리고 이런 평가를 한층 확고한 것으로 만들어 준 것이 셰익스피어의 희곡 ‘리처드 3세’였다. 셰익스피어가 그린 리처드 3세는 ‘악의 화신’ 그 자체다. 희곡에서 리처드 3세는 스스로를 ‘추악한 흉물’이라고 부르고 이를 핑계 삼아 온갖 악행을 저지른다.
그러나 리처드 3세는 정말 역사와 희곡, 그리고 영화 등을 통해 묘사돼 온 것 같은 구제불능의 폭군이었을까. 리처드 3세를 연구해 온 많은 학자들은 “그에 대한 이미지는 튜더왕조에 의해 조작됐을 가능성이 높다”는 견해를 나타낸다. 오히려 리처드 3세는 백성들에게 깊은 연민을 가졌던 군주였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어둠 속에서 침묵하던 리처드 3세는 500여년 만에 모습을 드러냄으로써 자신에 대한 역사의 기록에 항변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리처드 3세 유해발견을 계기로 진실을 찾기 위한 노력은 한층 더 활발해질 것이다.
그러나 이런 왜곡과 오해가 과연 역사 속 인물들에만 국한된 것일까. 다른 이들의 시각과 이해관계에 따라 만들어진 이미지를 무분별하게 받아들이는 오류는 역사뿐 아니라 오늘 우리의 일상 속에서도 무수히 반복되고 있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