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쿠로스 학파하면 ‘쾌락주의’를 떠올린다. 이성을 강조한 스토아 학파와의 대결구도의 최전방에 서 있던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 행복을 위해 감각적인 쾌락을 최우선시 했다는 그의 철학은 지금도 물질이나 본능적 욕구를 따르는 사람들의 논거로 이용되곤 한다. 그러나 철학자들의 사상을 심도있게 고찰한 책, 알랭 드 보통의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을 보면 그에 대한 오래된 오해를 풀 수 있게 된다.
행복을 위해 본능에 입각한 감각적 만족이나 물질의 풍요는 그가 말한 쾌락주의의 본질과는 거리가 멀다. 물질적인 것, 먹고 자고 입는 것의 기본적인 충족은 행복한 삶을 위해 갖추어야하지만, 그 기본적인 충족 이상의 물질적인 것의 추구는 행복과는 무관하다는 것이다.
이런 기본적인 감각적 충족 외에 그가 말한 행복의 조건은 자유, 사색, 그리고 우정이었다. 이 세가지가 충족되면, 기본적인 물질적 만족만으로도 지극한 행복에 도달할 수 있고, 아무리 엄청난 물질적 부를 가지고 있어도 이 세가지가 결핍되면 그 부는 행복과는 무관해진다. 아무리 호화로운 저택이라도 혼자 쓸쓸히 살아가야 한다면 그 저택은 기괴스런 건축물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가 말한 행복의 조건 중 사색과 자유는 혼자서도 얼마든지 추구할 수 있다. 하지만 우정은 다르다. 우정은 친구라는 존재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감정이다.
“진정한 친구들은 우리를 세속적인 잣대로 평가하지 않으며, 그들이 관심을 갖는 것은 우리의 내면적인 자아다. 우리를 향한 친구들의 사랑은 우리의 외모나 사회적인 지위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있다.”
에피쿠로스가 말한 위와 같은 우정을 나누는 친구가 있는가. 내가 무슨 일을 하든, 내가 어떤 옷을 입든, 내가 어떤 말을 하든, 내 곁에서 나를 지켜봐주고 나란 존재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내 귀에 쓴 말도 사려 깊게 해주는 친구. 성숙한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한 몸부림과 노력을 가치 있다며 응원해주는 친구. 멀리 있어도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친구. 자주 보지 못해도, 자주 소식을 전하지 않아도 서로를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친구. 그런 친구가 있는가.
세인트 루이스에 사는 중학교 동창인 친구는 내가 손으로 써서 보낸 편지를 화장대에 걸어두고 매일 내 글씨를 바라본다. 그녀는 자기 딸 이름을 내 이름으로 정했다. 딸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나를 떠올린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우리가 만난 횟수는 열번 남짓. 서로 다른 나라에서, 다른 주에서 살아왔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 아주 가까이 있다고 느낀다. 그리고 서로의 삶을 진심으로 응원한다. 나는 그녀가 누구보다도 아름다운 삶을 살아갈 거란 믿음에 한 치의 흔들림도 없다.
영하 20,30도의 혹독한 겨울, 러시아 한복판에서 일하는 대학 친구. 삶이 결코 녹록하지 않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아는 30대 중반의 그. 힘들다고 멈추거나 안주하는 것이 정답이 아니란 사실 또한 잘 알고 있는 친구다. 현실의 벽이 높을수록 더 큰 의지를 키울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이 다수가 가는 길이 아니라고 해서 틀린 길이 아니란 것을, 몸으로 살아내고 있는 친구. 우리는 서로를 응원한다.
행복해지는 것은 에피쿠로스나 알랭 드 보통이 하고자 하는 말처럼, 그렇게 어렵지 않다. 돈을 많이 벌 필요도 없고, 더 큰 집에 살 필요도 없다. 그런 것들에 노력을 기울이기보다, 진정한 친구 한 명을 가지는 것이 행복에 성큼 다가서는 길이라는 것을, 철학자의 입을 통하지 않고서도 나는 잘 안다. 내 친구들을 통해서 말이다.
<김진아 광고전략가 쿠알라룸푸르 Young & Rubic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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